원작이 [라빠르망]이라고 말하지 말라
원작이 [라빠르망]이라고 말하지 말라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10.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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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지면에 등장하는 여배우의 사진과 이름을 숙지한 다음 기사를 읽으시면 더 재미있습니다.

#할리우드 리메이크-귤화위지

어느 잘 나가는 극장에서[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이하 [당신이])를 봤다. 본의 아니게 극장을 ‘전세’ 내서 ‘나 홀로’ 봤다. 오전 시간대였다는 탓도 있었겠지만, 주말 저녁 시간이라 해도 관객 수는 크게 불어날 것 같지 않았다. 재미없는 영화였다.

[당신이]는 8년 전 세상에 나온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의 할리우드 버전이다. [라빠르망]을 수작으로 꼽는데 동의하지 않는 영화팬은 드물다. 그 수작을 할리우드는 어떻게 ‘재처리’했을까, 궁금했다.

따지고 보면 궁금할 것도 없었다. 유럽(또는 일본)의 수작을 할리우드가 망쳐 놓은 사례는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틴기어의 귀향], [니키타]가 [써머스비],[니나]로 리메이크 됐었는데, 같은 골격이면서도 분위기와 완성도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당신이]도 그럴 거라고 짐작했고, 틀리지 않았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원작의 탄탄한 연출과 상징장치는 쏙 빠지고, 이야기 구조의 참신성만 커닝한 꼴이었다.

#라빠르망 다시 보기-1

▲ 모니카벨루치 [라빠르망]이 높은 완성도를 성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맞춤한 배역을 들 수 있겠다. 당대의 ‘여신’ 모니카 벨루치에게서 ‘관능의 몸’이 아닌 ‘파멸의 눈’을 발견한 최초이자 마지막 영화가 [라빠르망]이다. 그녀를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라빠르망]의 이야기 구조에서 잃어버린 여인 ‘리자(모니카 벨루치)’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당신이]에서 ‘리자’로 나오는 여주인공 다이안 크루거(영화 ‘트로이’의 헬레나 역)에게서는 모니카 벨루치가 보여준 카리스마, 혹은 파멸의 이미지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없음’을 감독이 의도하고 만들었다는 점이다. 까닭에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그만한 여배우를 섭외하지 못해서였거나, [라빠르망]과의 차별성 확보를 위해 스스로 영화의 격을 낮췄거나 둘 중 하나로 짐작되는 것이다. 뒤에 것이 감독의 ‘의도’로 읽히는데, 조금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라빠르망 다시 보기-2 [라빠르망]은 최소한 두 번 정도는 봐야 이해가 되는 영화이다. 현재와 과거의 넘나듦이 매우 정밀해서 한 순간이라도 화면에서 눈을 떼면 이야기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넘나듦’을 단순히 영화의 형식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라빠르망]의 형식은 영화의 화면을 지속적으로 ‘단절’시키는데, 이 단절은 사랑의 단절과 같은 궤도에 있고, 동시에 그 사랑의 공간배경이 되는 ‘아파트’에 닿아 있다. 그래서 제목이 건물로서 ‘아파트’뿐만 아니라 ‘분리된’ ‘찢어진’ 등의 뜻을 지닌 ‘라빠르망 L'Appartement’이다. 통화중인 전화, 의도적으로 배달사고가 나는 쪽지 또한 ‘찢어진Apart’ 사랑의 은유로 기능한다. ▲ 로즈번
[라빠르망]의 이야기 구조 9할을 빌려다 쓴 [당신이]가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While You Were Falling in Love’라는, 아주 밋밋한 제목을 채택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리 말했듯이 이야기 구조의 참신성만 커닝하고 탄탄한 연출과 상징장치는 애시 당초 포기해버린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할리우드는 언제나 영화상품을 만든다. 영화예술이 아니라.

#할리우드, 그 천박한 문화테러에 대하여

상품을 만드는 일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예술은 좋고, 상품이 나쁜 것 또한 아니다. 문제는 할리우드가 매우 비겁한 방식으로 자기 시스템의 ‘자존심’을 세운다는 데 있다. 이런 식이다.

[레옹]의 영웅 장 르노는 [미션임파서블]에서 쥐새끼를 두려워하는 웃음꺼리 배역을 맡았고, [황비홍]의 영웅 이연걸은 [러셀웨폰]에서 멜 깁슨에게 맞아 죽었으며, 프랑스의 국민배우 격 되는 뱅상 카셀은 [오션스트웰브]에서 조지 클루니에게 거의 완벽하게 속아 우스꽝스러운 도둑이 되어버렸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 다이안 크루거 [라빠르망]의 품격을 스스로 포기한 [당신이] 또한 교묘한 방식으로 [라빠르망]에 테러를 가한다. [당신이]의 여우조연 로즈 번(영화 ‘트로이’에서 트로이 공주로 나오는)의 이미지는 [라빠르망]의 모니카 벨루치에 상당히 가깝다. 유럽영화의 주연 이미지를 할리우드 조연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다이안 크루거나 로즈 번이나 그 지명도에서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라빠르망]의 ‘느낌’을 따른다면 로즈 번이 차라리 주연(리자 역)을 맡아야 옳을 것도 같다. 그럼에도 뒤집어 버린 주.조연 설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다. [당신이]의 중심공간으로 등장하는 카페 이름이 ‘벨루캄인 점, 모니카 벨루치를 닮은 배우가, 비록 조연이지만 중심역할을 한다는 사실 등은 [라빠르망]에 대한 감독의 헌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신이]가 [라빠르망]을 매우 비겁한 방식으로 흉내 내고 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는 까닭은 그 ‘결말’에 있다. (못 보신 분들을 위해 결말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당신이]는 [라빠르망]에 대한 수준 낮은 차별화 전략이거나, 치졸한 문화테러 둘 중 하나다. 아주 오래전부터 할리우드는 규칙적으로 이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다. 이 같은 방식이란 자기네들 시스템 바깥의 영화자원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그 자원의 가치를 조롱하는 것이다. ▲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좌)와 라빠르망(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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