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현실주의
낭만적 현실주의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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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홍보포스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만 명작인 것이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람보]가 최고의 영화일 수도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일주일])에서 황정민은 “내 삶을 통째로 바꿨다”고 [람보]에 대해 말한다. 까닭은 “1당 100의 정신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황정민의 이 진술은 관객들에게 던지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영화 [...일주일]을 지탱하는 힘이 ‘개인의 진실’에 있기 때문이다. 88올림픽 유도특기생 자격으로 경찰계에 입문한 황정민에게 클라크 케이블보다는 실베스타 스텔론이 자신의 직업에 더 가까울 것이다. 개인의 진실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처지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그에게 영화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사랑에 관한 일곱 가지 보고서 [...일주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들 한두가지씩 결격사유를 갖고 있다. 예컨대 엄정화는 매우 건방진 이혼녀이고, 임창정은 착하기만 할 뿐 한없이 무능한 백수이며, 주현은 스크루지처럼 제 잇속만 챙기는 나이든 홀애비이다. 집단의 눈으로 볼 때 이 같은 결격사유들은 마땅히 고쳐야 할 좋지 못한 덕목들이다. 영화 [...일주일]의 미덕은 그 결격사유를 고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영화말미에 주인공들은 스스로 알아서 좋지 못한 덕목들을 털어낸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영화는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혹은 얻기 위해 일곱쌍의 커플들은 선인장 가시처럼 돋아난 제 몸의 껍질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진실은 타인의 진실과 만나게 되고, 삶의 지평은 더욱 넓어진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안 봐도 알만한 휴머니즘 영화군, 비디오로 봐도 되겠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일주일]은, 비디오 버전이 나오기까지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당장 달려가서 봐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대로, 무식하거나 유식한 사람들은 또 그 꼴대로 살아가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장면들을 부담 없으면서도 세련된 영상 속에 담아낸 영화가 [...일주일]이다. 개인의 진실을 탐구한 영화 ▲ 이혼녀와 노총각의 사랑.
[...일주일]을 두고 [러브액츄얼리](리차드 커티스, 2003)의 한국판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적절하지 않다. 따로 떨어져 있는 듯싶지만 사실은 연결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연출 방식은 [숏컷](로버트 알트만, 1995), [매그놀리아](폴 토마스 앤더슨, 1999) 등의 영화에서도 충분히 사용됐었다. 보편적인 영화연출의 한 방식을 차용했을 뿐, [...일주일]이 특정 영화를 흉내 내지는 않은 것이다.

[...일주일]은 [러브액츄얼리]와 [숏컷]의 장점을 모아 놓은 영화로 읽힌다. 다시 말하면 비슷한 형식을 갖춘 영화들 중에 [...일주일]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휴머니티는 강한 반면 삶의 긴장도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영화가 [러브액츄얼리]라면, [숏컷]은 그 반대다. [...일주일]은 휴머니티와 삶의 치열함 둘 다를 탄탄한 이야기구조, 그리고 유려한 연출로 아우른 수작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러브액츄얼리]와 [숏컷]의 장점을 합친 듯

▲ 가난한 신혼부부의 사랑. [...일주일]에서 흥미롭게 봐야할 대목은 ‘영화’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람보] 뿐만 아니라 [해리가 셰리를 만났을 때], [달콤한 인생], [시네마천국] 등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들이 재인용된다. 인용의 방식은 제각각이다. 폭력적인 세상의 반영으로서 폭력영화가 존재하느냐, 폭력영화 때문에 세상이 더 폭력적으로 변해가느냐, 는 해묵은 논쟁을 희극적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일주일]의 철학적 컨셉과 유사한 [달콤한 인생]을 영화 전편에 걸쳐 ‘배경’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로의 재건축을 계획했다가 이내 포기하고 단관을 고집하는 장면도 들어 있다. ▲ 중년의 사랑.
영화가 영화를 재인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가사 한 대목처럼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는 감독의 정서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정서가 퇴행적인 회고주의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주일]을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된다.

영화 속 ‘일곱가지 사랑’ 각각은 매우 고전적인 설정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사랑들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영화 [...일주일]을 최대한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낭만적 현실주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낭만의 감동도 챙기고, 현실의 생생함도 놓치지 않은, 매우 독보적인 영화가 [...일주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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