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사랑은 가라
껍데기 사랑은 가라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10.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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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 너는 내 운명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빨간 다라이에 몸 담그고 부끄럼 빛내며 서로 희롱할지니....

# 사랑

“죽어도 좋아”
박진표 감독이 만든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신혼재미에 푹 빠진 남자주인공 황정민이 한 말이다. 이 말은 박 감독의 첫 번째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 영화의 한 장면. 감독의 전작 [죽어도 좋아]에서도 중요한 소품으로 쓰인 빨간 다라이. “20대가 하면 포르노고 70대가 하면 예술이냐?”는 비아냥을 들었던 첫 번째 작품 [죽어도 좋아]에서 감독은, 사회적으로 성적 욕망을 인정받지 못한 70대 노인들의 사랑을 다뤘다. 비아냥 뿐만이 아니라 호평도 많았는데, 다만 ‘소재주의’의 우려를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다. [너는 내 운명]은 이 같은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 박진표식 사랑의 마침표와도 같은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박진표식 사랑이라 함은, 온전한 인격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남녀상열지사를 말한다. 70대 노인과 농촌총각과 다방레지는 사지가 멀쩡한데도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인이고, 농촌총각이고, 다방레지이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의 비논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진술이, 그러나 비논리가 아닌 까닭은 우리 주변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 [너는 내 운명]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남여상열지사를 다룬다.

나이 들어 홀로된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성적 욕망을 걱정하는 자식은 본 적이 없으며, 과년한 처자가 농촌총각과 맞선 본다는 이야기는 스타급 여자 연예인이 평범한 남성과 열애중이라는 소식만큼이나 듣기 어렵다. 일찍이 삼순이와 금순이가 당했듯이 반듯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신부감 욕심 앞에서는 다방레지의 ‘ㄷ’ 자도 꺼낼 수가 없는 것이다.

못난 놈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좋다고 하였던가. 하여 그들은 그들끼리 만난다. 농촌총각 황정민과 다방레지 전도연의 만남은 그래서 가능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며, 그런 이유로 인해서 [봄날은 간다]의 두 선남선녀 주인공처럼 ‘쿨’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다, 는 맹세와 죽어도 좋다, 는 신파조의 다짐은 결코 오버가 아니다. 어떻게 맺어진 사랑인데....

#빨간 고무다라이

[죽어도 좋아]와 [너는 내 운명]에서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소품은 빨간 고무다라이이다. 서로의 몸을 희롱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최소한의 공간으로서 빨간 고무다라이는, 특히 [너는 내 운명]에서 모텔의 우윳빛 욕조와 대비된다.

모텔의 욕조는 ‘거러의 공간이고, 빨간 고무다라이는 ‘사랑’의 보금자리라는 이야기일까. 그런 것 같다. 박진표식 사랑은 늘 투박한 살림살이와 함께 진행된다. 그 살림살이들은 조명이나, 카메라 앵글이 유별나다고 해서 빛이 나는 물건들이 아니다.

이야기의 탄탄함과 정직한 카메라로 승부를 거는, 그럴 수밖에 없는 [너는 내 운명]의 특질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랑이 그토록 숭고하다면 무슨 장식이, 깜짝쇼가, 주절대는 말들이 필요하겠는가. 한마디로 ‘껍데기는 가라’인 것이다.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빨간 다라이에 몸 담그고 부끄럼 빛내며 서로 희롱할지니.... 상대가 의사이거나(금순이), 돈많은 청년사업가이거나(삼순이), 혹은 루루공주(정준호)인 그 모오든 껍데기는 가라, 라고 외치는 영화가 [너는 내 운명]이다.

정글같은 세상의 법칙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사랑이야기. 기댈 것이라고는 오직 당사자들의 진실뿐인 버림받은 삼류인생의 ‘선데이서울’ 같은 사랑.

그러고 보니 진짜로 그렇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몸을 팔았다고 보도된 ‘여수 성매매 여성 에이즈 사건’이 그 실화이다. 이 땅의 숱한 정론지 ‘선데이서울’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랬나’라는 제목을 달게 했던 그 이야기를 재구성한 영화가 [너는 내 운명]이었던 것이다.

#에이즈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했다는 [너는 내 운명]은, 영화가, 예술이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모범답안으로 보여준다. 놀랄만한 실화를, 단지 관객을 끌어 들이기 위한 후광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감독의 철학을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기가 [너는 내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그들 삶의 이면을 허구적으로 엮은 다음, 야무지고 잘난 세상의 가학주의를 조심스럽게 폭로하고 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증오의 메카니즘을 다룬 보고서이기도 한 게 [너는 내 운명]인 것이다.

영화는 남자주인공의 형을 통해서 이 점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관객들은 저 형 나쁘다, 고 느꼈겠지만, 실상 감독은 우리 모두가 그 형과 같지 않은지 되묻고 있다. 그 되물음에 대한 답변이야 얼마든지 교과서적으로, 착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언제 농촌총각들에게 관심이나 가졌던가, 이 말이다.

‘6시 내고향’이나 ‘추석특집’ 프로그램 따위를 통해 연변, 베트남, 필리핀의 여인들과 짝 맺고 살아가는 그들을 때로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때로는 흥미로운 구경거리 삼아 엿보았을 뿐.

사랑의 절대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는, 그 사랑을 통해 농촌, 인권, 위선, 인간 등 세상사의 주요한 어휘들을 나름의 안목으로 일별하고 있다. 영화가 취하고 있는 신파조의 형식에 대해서만 과도하게 집착하는 논객들의 안목이 여러모로 아쉽다.
[너는 내 운명]은 참으로 생각해볼 게 많은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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