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의 인플레이션
스타일의 인플레이션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09.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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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 형사 Duelist
▲ ⓒ형사 Duelist 눈부시다. 그러나 그 눈부심은 홍등가의 그것처럼 허망하다. 허망한 눈부심. 이야기가 빈곤한 영화일수록 자기기만에 더 철저한 법이다. 영화 [형사]는 이야기를 빼 내어 텅빈 자리를 음악이나, 카메라의 눈속임이나, 화려한 세트로 채웠다. 그러나 그 채움은 이야기의 빈곤을 보다 처절하게 자기고백할 뿐, 영화를 상승시키지는 못했다. 이명세가 당초에 스타일리스트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선과 색감, 소리와 침묵을 주물럭거리는 한국 최고의 폼쟁이(스타일리스트를 번역하면...)이니 그 맥락에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명세에게는 미안하지만, 어디 세상인심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어떤 사내가 원래 나쁜 놈이라고 해서 그의 폭력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영화는 대략 재미, 의미, 아름다움 등의 범주 안에서 맴돈다. 그래서 영화는 이 셋이 잘 융합되어 있거나, 하나가 빠져 있거나, 하나만 있거나, 하나도 없는 것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때 ‘이야기’는 이 셋에 추가된 네 번째가 아니다. 전체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공기’와도 같다. 공기로서 ‘이야기’는 잘 직조되어 있으면 그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운 반면, 허술할 경우 영화를 죽여 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호의적으로 접근할 경우[형사]에서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긍정성은 ‘아름다움(눈부심)’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후원이 없는 [형사]의 아름다움은, 방부 처리된 절세미인의 그것처럼 창백하다. 이명세는 뮤직비디오나 씨에프(CF) 감독이 아니고, 영화감독이다. 이야기는 필수다. 이야기에세서 도망칠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는 없다.빈곤한 이야기, 넘치는 폼 [형사]가 빈곤한 대목은 비단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액션을 큰 축으로 삼고 있는 영화인데도 액션은 없고 ‘춤’만 나부낀다. 액션과 춤의 결정적 차이는 ‘긴장’에 있다. 죽음을 전제로 한 칼싸움인데도 손에 땀이 나기는커녕 한숨만 나온다. 차라리 어린이 만화영화 [프린세스 츄츄]처럼 춤에 관한 영화라면 더 나을 뻔 했다. [형사]의 화면은 다만 아름다울 뿐,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므로, 관객은 그 아름다움을 수용해야 할지 대략 난감한 것이다. ‘춤’을 인정하더라도 흠은 더 있다. ‘춤’을 출 때마다 배경에 깔리는, 웅장하거나, 비장하거나, 서정적인 음악은 관객에게 억지감동을 주려는 편집의 폭력인 것만 같다. 또한 ‘춤’을 출 때마다 그 ‘춤’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는 감독의 지나친 ‘친절함’ 또한 몹시 거슬린다. 주인공들의 동작은 왜 그리도 큰지, 스티븐 시걸과 양자경과 박상민(장군의아들)과 최민수 등 셀 수 없는 액션배우들의 동작을 섭렵한 한국의 관객들이 필시 카메라 조작임이 뻔한 하지원.강동원 커플의 ‘폼’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폼이라면 [연인]의 장쯔이가 이미 다 보여줬다. ▲ ⓒ형사 Duelist
화려할 뿐, 긴장없는 액션

어떤 이는 빼어난 ‘미장센’이 건질만하다고 말한다. 상황을 설명해 나가는 무대세팅을 아주 잘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형사]의 미장센은 감독 자신의 최고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정사정볼 것 없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다란 계단이 좀더 입체적으로 바뀌었고, 나부끼는 광목천에 색깔이 입혀졌을 뿐이다.

연기도 엉망이다. 하지원과 안성기의 전라도 사투리는, 아마도 웃겨보겠다고 도입한 모양인데 어설프기 짝이 없어 웃음 이전에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강동원의 이미지는 ‘슬픈 눈’인데, 바라보고 있으면, 오히려 여기서 웃음이 나온다. 성공하지 못한 이미지 조작은 관객의 조롱을 받기에 딱 좋다.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했다. [형사]는 ‘이명세표’에 대한 과욕만 돋보이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다. 스타일의 과잉이 스타일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오버의 오버의 오버’ 정도라 해야 할까.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자기욕심만 잔뜩 부린 꼴이다. 그 욕심의 반의 반만 이야기에 투자했더라면, 혹은 폼을 덜 잡는데 심혈을 기울였더라면, 이처럼 심각하게 관객의 외면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명세 표’에 대한 지나친 과욕

그런 면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에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배치한 점이 흥미롭다. 이야기의 중요성은 나도 안다, 그런데 그 이야기 포기하고 찍고 싶은데로 영화를 한번 찍어 보고 싶었다, 그러니 이야기가 있네 없네 따위의 비판은 하지 말아라, 라는 말을 하기 위해 마련한 감독의 조롱처럼 느껴진다.

그렇더라도 너무했다. 그나마 [형사]가 제시하고 있는 빈곤한 이야기조차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속 배우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도대체 왜 달리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하지원이 강동원(혹은 이 반대)에게 반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야기로도 이미지로도 그 반함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

사랑의 불가해한 속성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영화는 최소한의 설명이나 이미지화의 노력도 없이 그냥 ‘반했다’이다. 그렇게 가정하고 영화를 감상해보자는 투다. 감독에게는 자기 영화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으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

문제는 둘의 사랑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의 핵심 모티브로서 사랑은 관객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나머지 모든 파생물들이 설득력을 상실할 수밖에.

종합하면, [형사]는 관객들이 사랑의 맥락도, 싸움의 긴장도 수용하지 않는 터에 이 둘을 합쳐 ‘사랑하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컨셉을 들이 밀고 있는 판국이다. 시쳇말로 여성 앞에서 ‘군대에서 축구 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꼴이다.

그냥 사랑해도 될 것 같은데 온갖 멋을 부려가며 싸우면서 사랑하고 있는 두 젊은 배우들을 보는 눈은 매우 씁쓸하다. 그 씁쓸함의 제공자가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수식어를 단 중견감독 이명세의 작품이라니, 암울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처참한 영화경험은 김성수 감독의 [무사] 이후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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