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머니즘
역사적 사실을 소재 삼은
영화들이 휴머니즘을 이야기할 때 그 휴머니즘의 본질은 대부분 ‘도피’이다. 도피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의 다양한 해석을 ‘봉합’하려 한다는
것이다. 봉합의 방식은 눈물, 콧물, 혹은 마초이즘이다. 눈물, 콧물, 마초이즘이 휴머니즘일까, 궁금하지만, 감독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이 때 역사는 다만 풍경으로 이용될 뿐이다. 대중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익숙함’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위일 뿐인
것이다. [흑수선],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효자동이발사]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역사에서 ‘인간’을 찾겠다는 이들
영화들의 공통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상식’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식’은 다만 ‘상식의 탈을
쓴 허구’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혹 허구가 아니더라도 감독들은, 그들 특유의 상업적 친절함으로 역사를 결코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 새로운 해석, 문제제기는 당초에 없을 수밖에 없다. 영화의 ‘생각 없음’을 덮기 위한 세련된, 그러나 오버하는 연출이 이들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고, 음악은 처참하거나 아름답다. 이들 영화들이 종내에는 꼭 신파조로 흘러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에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라면 이 같은 폼을 잡지 않는다. [황산벌]을 보라.
[웰컴 투
동막골]은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일까.
역사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웰컴 투 동막골]은 진부한 영화다. 하지만 절묘하게
설정된 ‘남-북 연합군’ 장면은 참신하다. 문제는 ‘남-북 연합군’ 결성의 근거가 다만 휴머니즘일 뿐이라는 것. 역사의 본질은 건드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드러내는 가장 강렬한 장면은, ‘양민학살’ 직전까지 긴장이 고조되는 국군과 미군 대 동막골 사람들 간의
대립이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업영화로서는 쉽지 않은 설정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짬뽕’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그 짬뽕을 가능케 한 접착제는 ‘낭만’이다. 낭만이 다다른 최고의 역사해석은 민족주의이다.
어설프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그런 민족적 휴머니즘 영화가 [웰컴 투 동막골]이다.
#영화속 영화
[간첩 리철진]과 [킬러들의 수다]는 흥행과 완성도의 측면에서 모두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장진 감독의 영화이다.
이 천재적인 감독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쓸쓸한 웃음’이다. 킬러들은 착하고, 남파간첩은 양아치들에게 가방을 털린다. 슬픔이 동반된, 성찰이 함께 하는 웃음을 제공해준다는 면에서 그의 영화는 특별하다. 박광현이라는 신인감독이 만들었음에도 [웰컴 투 동막골]이 자꾸만 원작자인 장진과 함께 거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이다. 그가 관여하고 있는 제?사의 이름이 ‘필름있수다’인 것도 재미있다.
[웰컴 투 동막골] 또한 오래전부터 펼쳐 온 ‘슬픈 웃음’이라는 그의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화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만들지는 않았다.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박수칠 때 떠나라]는 다른 궤도선상에 위치한 영화로 보인다. 스스로는 변신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는 후배 감독에게 넘기는 이 태도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개 같은 날의 오후],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동감], [아는 여자] 등 숱한 영화들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장진을 눈여겨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