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광업소 트럭 타고 시집 온 이희순씨
“이빨하고 눈만 번득번득한께 신랑 얼굴도 못알아 봐”▲ 60-70년대 화순광업소를 이야기하는 이희순씨. ⓒ모철홍 | ||
광부 남편을 내조하는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이씨는 ‘빨러를 꼽았다.
“주먹만한 탄껍질이 옷에 붙어 있기도 해. 서너번씩 헹궈야 하는데 우물가 같은 데서는 빨 수도 없어. 그래서 요 앞 냇가에서 빨래를 했다고. 각시들이 우글우글 나와서 빨래를 하면 장관이었제. 날마다 그랬어.”
이씨는 “대한민국 돈이 다 몰려 있었던 것 같았다”고 60-70년대를 회고했다.
“중국집, 고깃집, 생선집, 막걸리집... 장사집이 겁나게 많았어. 월급 나온 날이면 여기저기서 난리가 나. 하룻 저녁에 월급을 몽땅 써분 사람도 쌨고...”
두세달씩 월급이 밀리는 때도 있었다는 것이 이씨의 기억. 그래도 ‘돌탄’이 있어서 춥게 살지는 않았다고.
“갱을 파고 나서 버린 돌들 틈에서 탄을 추려내 불 일러서 썼제. 그때는 산에 나무가 통 없었응께. 탄 덕분에 다른 동네 사람들보다는 더 따뜻하게 산 것이여.”
이씨는 ‘광업소 트럭’을 타고 시집왔다. 작은 차가 보성 친정마을로 오다가 물을 못 건너자 남편이 커다란 화물트럭을 보낸 것. 5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지금은 구암삼거리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그 세월을 알랑가 몰라, 참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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