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죽은께 사는 거지"
"안 죽은께 사는 거지"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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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들의 섬 소록도를 찾아서

▲ 고흥 녹동항에서 600m, 뱃길로 5분 거리 소록도. 관광객들과 한센인들이 철선을 타고 함께 드나든다. 섬의 모습이 작은 사슴을 닮았다 하여 "소록도"(小鹿島)이다. ⓒ모철홍(이하 동일) 병(病)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사소할 지라도 병에 걸리고 싶어 하는 사람 또한 없다. 병은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에게 찾아들며, 찾아들 때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 존귀 따위를 결코 따지지 않는다. 병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만,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병을 차별한다. 사람이 병에 걸린 사람을 차별한다. 그가 감기에 걸렸다고는 손가락질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그가 ‘문둥병’(이하 한센인)에 걸리면 돌팔매질로 공동체에서 좇아내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이미 사람이 아니게 된다. 전남 고흥의 소록도는 ‘사람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다.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점에서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은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귀환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센인들은 여전히 ‘사람 아닌 사람’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여든 고령의 "소록도 할머니" 두분이 힘겹게 언덕을 오르고 있다. 이들의 구부러진 허리처럼 소록도의 역사 또한 폭력과 살인, 인권침해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국가인권위는 6월28일~30일 사흘 동안 소록도 현지에서 순회인권상담을 실시했다.

'사람 아닌 사람' 소록도 한센인

지난달 28일~30일 사흘간 소록도 현지에서 벌어진 국가인권위원회의 ‘순회상담’은 한센인들이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동안 한센인에 대한 따뜻한 손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손길들은 민간 차원에 머물렀으며, 시혜나 봉사, 의료적 접근에 한정되어 있었다.

소록도를 찾은 인권위 조영황 위원장은 “질병관리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의당 누려야 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한센인 여러분을 만나고자 한다”는 말로 순회상담의 의미를 요약했다.

▲ "배가 고파서 죽고, 도망가다 앵기믄 감금실에 갇아 놓고 뚜드러 패서 죽고..." 김점례(82)할머니. “배가 고파서 죽고, 도망가다 앵기믄 감금실에 갇아 놓고 뚜드러 패서 죽고…”김점례(82) 할머니가 기억하는 소록도는 ‘죽음’이다. 고흥군 팔영산 자락 아래서 태어나 16살 때 팔꿈치에 ‘나병’이 생겨 제 발로 소록도를 찾아 들어왔다는 김할머니. 가늠해 보니 1939년, 일제의 만행이 가장 악랄했던 시절에 소록도 생활을 시작했다. “가마니도 치고, 백돌(벽돌)도 굽고, 선창까지 백돌을 머리로 다 이어 날랐제. 그란디 묵을 것은 밀가리(밀가루) 쬐끔, 콩 깨묵 쬐끔 그랬어. 일은 징하게도 많이 시켰제.” 할머니가 말하는 또 하나의 소록도는 ‘일’이었다. 소록도를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가 ‘일’과 ‘죽음’인 셈이다. 살려고 일을 했다기보다는 오직 죽지 않기 위해서 “사꾸라 몽댕이로 얻어 맞음서” 일을 했다는 증언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 일했다 그 와중에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스무살 무렵, 4살 연상인 장흥 출신 김상동(올해 2월 작고)씨와 신접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끔 ‘단종’(斷種) 수술을 해야만 했다.(단종은 해방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징한 세월인디, 어쩌꺼시여, 이라고 살다가 죽어야제.”지금, 김 할머니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니 있다. 매월 꼬박꼬박 ‘배급’되는 정부보조금 4만5천원이 할머니가 세상과 맺고 있는 유일한 끈이다. 경남 의령군이 고향인 구남이 할머니(80)도 김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소록도에 들어왔다. 일과 죽음, 단종과 결혼 등 삶의 이력 또한 거의 같다. 다만 구 할머니는 사회정착의 기회를 한번 가졌었다. ▲ 단종(斷種)대. 일제는 한센인 체벌의 수단으로, 혹은 결혼의 조건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만드는 단종을 강제로 실시했다. 단종은 1990년대까지 지속됐다.

“해방 되고 나서 여자로 혼자 살다 보이 옹색해서 서방을 하나 얻었다 아이가. 병도 다 낫고 해서 경남 사천으로 가서 한 8개월 살았지. 못살겄드라. 소록도가 좋아서 다시 왔다 아이가.”

3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조카들이 있을 뿐, 피붙이 하나 없이 할머니는 혼자다. 남은 소망은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구할머니.

“좋은 때가 어데 있고, 나쁜 때가 어데 있겠나. 안 죽은께 사는 거지.”
할머니는 좋은 시절도, 나쁜 시절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세월 그 자체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구 할머니집 안마당에는 부추잎과 고구마 순이 파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들

병원관계자 200여명, 한센인 700여명 등 1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소록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국립소록도병원과 그 관계자들이 살고 있는 ‘1번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한센병력을 가진 이들이 살고 있는 ‘2번지’이다.

▲ 검시실 또는 해부실. 소록도의 모든 사망 한센인은 본인 및 가족의 뜻과는 상관없이 죽은 뒤 "해부"되어야만 했다. 첫째는 발병, 둘째는 해부, 셋째는 화장으로 소록도 한센인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나왔다. 일제시대였던 1916년 개원 이래 여태 변하지 않고 있는 소록도의 구조다. 지난 1998년부터 4년 동안 소록도 한센인 자치회장을 맡았던 강대시(65)씨는 “1번지와 2번지의 구분을 없애는 것에서 소록도 변화의 첫단추를 꿰야 한다”고 강조하고 “병원 중심의 섬이 아닌 한센인의 자치구로 섬이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센병에 대한 오해를 없애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카톨릭의대 채규태 교수는 “발병율이나 전염율이 거의 0%에 가까운 오늘에 이르러서도 구분 짓고, 격리시키는 구조를 유지한다는 것부터가 여전히 편견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현재 소록도의 한센인들 중 치료중인 양성환자는 7명, 나머지 한센인들은 몯 병이 완쾌된 음성환자들이다. 이들 중 2/3 정도의 숫자가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소록도는 치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이미 삶의 터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소록도의 장기적 전망으로서 ‘한센인들의 실버타운’이 거론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 맨몸으로 바다를 메웠던 오마도 간척공사 장면. 이 간척공사의 결과는 고스란히 국가가 강탈해갔다. ⓒ국립소록도병원

113만평의 부지에 8개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소록도는 고흥 녹동항에서 직선거리 600m, 뱃길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으며, 실제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소록도를 드나들고 있다. 한센병과 관련 ‘전염’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현대의학이 한센병을 충분히 제압한 데 따른 결과다.

하지만 눈물과 한숨, 한으로 얼룩진 소록도의 ‘역사’는 올곧게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소록도 약사, 아래 상자기사 참조 )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강제노동, 살인 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진실규명, 명예회복, 배상 등의 작업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1년 국가배상까지 끝낸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인권위 순회상담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록된 상담 결과는 국내의 정책과 법률 제정, 그리고 일본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김명호 소록도 자치회장은 “한센인들의 오랜 숙원사업인 명예회복을 비롯해, 특히 소록도에서 심했던 인권침해의 역사적 진실 또한 밝혀져 ‘이후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터닦기”라고 순회상담의 의미를 설명하고 “병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절망감”이라고 한센인들의 아픔을 전했다.

▲ 국가인권위가 인권상담을 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한센인들의 강제노동과 인권침해 사실을 사과하고 2001년 정부차원에서 배상했다. 한국의 경우 최초의 국가 차원 실태파악이다. ■ 소록도 약사 일제는 1916년 소록도의 일부(5분의 1)를 매수한 뒤 가건물을 세워 그해 5월17일 ‘소록도자혜의원’을 개원했다. 당시 초대원장은 일본인이었다. 이들은 병의 치료는 도외시한 채 먹을 것과 입을 것마저 제대로 보급하지 않았다. 병동, 관사, 창고 등의 건축을 위해 산을 파내 땅을 메우고 나무와 돌을 옮기는 대역사에 환자들을 동원하였다. 채찍에, 추위에, 탈진에 쓰러지는 환자가 속출했으며,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겨났다. 섬을 탈출하려다 물귀신이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제는 그후 2차 매수(약 5만평)를 강행하여 병사를 신축했다. 해방이 되자 한국인 직원은 치안유지회를 조직, 병원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환자 소요사건이 발생해 한센인 84명을 피살, 송진과 함께 태워져 매장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후 1947년 미 군정청으로부터 치료약품이 도입돼 환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나병은 낫는다’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1962년에는 환자들의 정착촌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오마도 간척공사를 착공해 환자들은 맨몸으로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센인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2년 뒤 이 사업을 전남도로 이관, 한센인들은 절망, 분노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다룬 소설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다. 병원의 공식명칭은 국립소록도병원. 보건복지부 직할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700여명의 환자가 입원 중에 있으며 대부분이 음성환자로 한센병 후유증으로 인한 중증, 중복 장애를 지니고 있다. 소록도에 뭍사람들의 출입이 허용된 것은 지난 88년부터. 녹동항에서 철선이 일반인과 환자들을 실어 나른다. 지금도 소록도 곳곳에는 아픈 과거를 말해주는 감금실, 검시실, 단종대, 신사 등이 남아있다. 섬의 모습이 작은 사슴을 닮았다 하여 소록도(小鹿島)이다. ■ 인터뷰(채규태 카톨릭의과대 교수) ▲ 채규태 교수

-한센병은 전염병인가
=그렇다. 하지만 격리할 필요가 없는 제3군 전염병이다. 병세가 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리팜파신 4알을 복용하면 전염력이 상실된다.

-격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나
=한센병 치료원칙은 통원치료, 재가치료, 통합치료다. 완치된 사람은 병이 나기 전 상태로 돌아가야 진정한 의미의 완치이고, 지속적인 진료가 필요하다.

-완치됐는데도 지속적이 진료가 필요한가
=한센병은 완치됐다 하더라도 신경손상과 손, 발, 눈의 변형으로 인한 합병증이 생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진료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한센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가져야 할 생각은 무엇인가
=병으로 인한 고통은 차라리 쉬운데 사회적 고통이 더 심하다는 것이 한센인들의 마음이다. 편견을 갖지 말고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소록도가 풀어야 할 숙제는...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병원 중심이고, 한센인들을 관리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제 소록도는 단순한 환자촌이 아니라 식민지, 사회적 약자, 인권 등의 개념들이 얽힌 역사적인 공간이다. 섬 자체가 사람까지를 포함하여 박물관인 것이다. 한센인들의 실버타운이자 인권박물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섬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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