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과 걸개그림
6월항쟁과 걸개그림
  • 배종민
  • 승인 2005.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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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민의 미술세상]

오월 망월묘역에서 만난 대학생

금년 오월에 겪은 에피소드 두 가지이다. 모 대학에서 오월미술을 주제로 강의할 때 일이다. 5월광주가 6월항쟁으로 계승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고 박종철 열사의 장례식장면을 슬라이드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는 차치하고 6월항쟁조차 아는 학생이 드물었다. 며칠 후 망월동구묘역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묘역에는 전국 각처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 5.18 25주기를 맞아 망월동 5.18구묘역을 찾은 대학생 순례단들.ⓒ배종민 그중에 이한열열사의 분묘 앞에서 설명을 듣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오월정신계승’이라는 글귀가 선명한 흰 상의를 단체로 입은 모습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겼다. 인솔자가 망월묘역에 이한열열사가 안장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곁에서 설명을 듣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최루탄은 하늘에 쏴서 매운 흰 연기를 내뿜는 진압장비인데, 사람을 향해 발사하면서 이한열열사가 목숨을 잃었다는 요지의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최루가스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나에게 지금 대학생들이 최루탄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걸개그림으로 기억되는 6월항쟁 ▲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15년전]에 다시 걸린 최병수외,[한열이를 살려내라](걸개그림, 750×1000cm,1987) ⓒ배종민
우리 현대사에서 1987년 6·10항쟁이 차지하는 위상은 각별하다. 1948년 제주 4·3항쟁에서4·19혁명(1960), 부마항쟁(1979), 5·18항쟁에 이르기까지 항쟁에너지는 특정지역에 고립되었다. 사람들은 국가폭력의 잔혹성에 진저리쳤고, 진실은 철저히 왜곡되고 감추어졌다. 그러나 패배와 좌절로 점철된 항쟁의 기억은 6월항쟁을 전기로 반전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한 국민대회는 ‘최루탄추방결의대회’(6.10)를 시작으로 ‘명동성당 농성’(6.15), ‘국민평화대행진’(6.18)등의 일정으로 이어졌다. 연인원 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박종철고문치사진상규명과 4·13호헌조치철회 및 민주헌법개정을 주장하며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한열(연세대학생, 광주 진흥고 출신)이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고 중태에 빠졌다(7.4사망). 시민들은 더욱 분개하였다. 급기야 6·29선언이 있던 날에는 전국 34개 도시 4개 군에서 1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4·3항쟁부터 5·18항쟁까지 국가권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과 억압된 민중의 힘이 일거에 봇물처럼 터졌던 것이다.

나는 6월항쟁당시 전방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그러나 한 장의 그림으로 인하여 6월항쟁은 내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되어있다. 최병수·문명미·김경고·김태경·이소연이 공동으로 제작한 [한열이를 살려내라](750×1000cm,1987)라는 걸개그림이 그것이다. 최루탄에 맞아 선혈이 낭자한 이한열과 등 뒤에서 그를 부축하던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록 항쟁의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 걸개그림으로 인하여 6월항쟁은 나에게도 역사적 경험이 된 것이다. 이것은 제주4·3항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대통령의 공식사과가 있기까지 약 55년 동안 4·3항쟁은 금지된 언어였다. 그러나 현기영의 소설『순이삼촌』(1978),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1987), 강요배의 제주민중항쟁사 화집『동백꽃 지다』(1992)에 실린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4·3항쟁은 살아 숨쉬는 역사였던 것이다.

▲ 1987년 6월 항쟁 당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SY44)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당시 연세대생)열사 영결식 ⓒ배종민 고교시절 4월이 오면 선생님께서는 4·19혁명을 들려주었다. 3·15부정선거와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비참한 죽음을 언급할 적에는 음성까지 높아지셨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4·19혁명은 실감이 나지 않는 옛이야기였다. 마치 금년 오월에 만난 대학생들에게 6월항쟁과 최루탄이 낯설듯이. 그 이유를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4·3과 5·18, 6월항쟁에 비하여 4·19혁명이나 부마항쟁에 관한 작품을 보지 못한데 기인한 것은 아닌가 싶다. 강요배의 한라산과 붉은 동백꽃, 홍성담의 오월판화연작, 이한열의 걸개그림과 달리 4·19혁명과 부마항쟁의 경우는 문화적 재현물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나의 과문한 탓이 주된 이유겠지만. 끊임없이 써가는 역사 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사이의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였다. 그의 언급처럼 과거는 철지난 유행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 있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그 몫은 전적으로 당대인에게 맡겨 져있다. 국가폭력에 의해 왜곡되고 유폐된 항쟁의 진실이 연어처럼 세월을 거슬러 되살아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그림과 노래, 시와 소설, 연극과 영화를 통한 문화적 재현은 대단히 큰 역할을 감당했다. 국가권력이 정치적 · 사상적 억압을 통해 과거를 은폐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그림과 시, 노래와 연극을 통해 진실을 기억하고 역사를 새롭게 써갔기 때문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목청껏 부를 그 노래가 없었더라면 과연 숨쉴 수 있었을까? 펄럭이는 깃발 속에 담긴 그림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더욱 어두웠으리라. 지금 그러한 그림, 그러한 노래, 또 그러한 시가 그립다. 어깨를 걸고 목청껏 부르고 싶다. ▲ 강요배,[한라산 자락의 백성](캔버스에 아크릴릭, 112×193.7cm, 1982) ⓒ배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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