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오월에 겪은 에피소드 두 가지이다. 모 대학에서
오월미술을 주제로 강의할 때 일이다. 5월광주가 6월항쟁으로 계승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고 박종철 열사의 장례식장면을 슬라이드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는 차치하고 6월항쟁조차 아는 학생이 드물었다. 며칠 후 망월동구묘역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묘역에는 전국 각처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 현대사에서 1987년 6·10항쟁이 차지하는 위상은 각별하다. 1948년 제주
4·3항쟁에서4·19혁명(1960), 부마항쟁(1979), 5·18항쟁에 이르기까지 항쟁에너지는 특정지역에 고립되었다. 사람들은 국가폭력의
잔혹성에 진저리쳤고, 진실은 철저히 왜곡되고 감추어졌다. 그러나 패배와 좌절로 점철된 항쟁의 기억은 6월항쟁을 전기로 반전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한 국민대회는 ‘최루탄추방결의대회’(6.10)를 시작으로 ‘명동성당 농성’(6.15), ‘국민평화대행진’(6.18)등의 일정으로
이어졌다. 연인원 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박종철고문치사진상규명과 4·13호헌조치철회 및 민주헌법개정을 주장하며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한열(연세대학생, 광주 진흥고 출신)이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고 중태에 빠졌다(7.4사망). 시민들은 더욱 분개하였다. 급기야
6·29선언이 있던 날에는 전국 34개 도시 4개 군에서 1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4·3항쟁부터 5·18항쟁까지
국가권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과 억압된 민중의 힘이 일거에 봇물처럼 터졌던 것이다.
나는 6월항쟁당시 전방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그러나 한 장의 그림으로 인하여 6월항쟁은 내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되어있다.
최병수·문명미·김경고·김태경·이소연이 공동으로 제작한 [한열이를 살려내라](750×1000cm,1987)라는 걸개그림이 그것이다.
최루탄에 맞아 선혈이 낭자한 이한열과 등 뒤에서 그를 부축하던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록 항쟁의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
걸개그림으로 인하여 6월항쟁은 나에게도 역사적 경험이 된 것이다. 이것은 제주4·3항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대통령의 공식사과가
있기까지 약 55년 동안 4·3항쟁은 금지된 언어였다. 그러나 현기영의 소설『순이삼촌』(1978),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1987), 강요배의 제주민중항쟁사 화집『동백꽃 지다』(1992)에 실린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4·3항쟁은 살아 숨쉬는 역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