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원죄를 피로 쓴 영화
우리 모두의 원죄를 피로 쓴 영화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05.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혈의 누
[혈의 누]는, 조선시대 말엽, 종이산업을 기반으로 탄탄한 공동체를 구축한 외딴 섬 동화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동화도에서는 조정에 바쳐야 할 종이와 수송선이 함께 불타는 사고가 벌어지고, 그 사건을 해결하고자 수사관 원규(차승원) 일행이 섬에 들어온다. 그날부터 하루에 한명씩 참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닷새 동안 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섬마을의 비밀은 하나둘씩 밝혀지고, 누가 살인범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한 영화적 진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혈의 누]는 [번지점프를 하다](2000)로 빼어난 연출력을 선보인 김대승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의 거리는 4년. 그 짧지 않은 시간만큼 두 영화는 스타일에서 매우 달라,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을 눈치 채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두 영화가 보듬고 가는 공통의 관점이 있는데, 우선 이야기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켜 편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 같은 기법이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겠다. [올드보이] [박하사탕] [메멘토] 등이 그렇듯이 이른바 ‘플래시백’ 기법은 흔하게 쓰이는 영화문법이지 않겠는가. 두 영화가 진정으로 닮은 점은 ‘신비주의적인 접근’이다. 영화적 갈등을 명확하게 해소시키지 않고, 제의(祭儀)적인 결말을 제시하면서, 나쁘게 말하면 ‘어영부영’, 좋게 말하면 ‘열린결론’을 지향하는 감독의 태도에서 두 영화의 어미가 김대승 감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번지점프…]가 그랬듯이 [혈의 누] 또한 촘촘한 시나리오와 유려한 연출력을 자랑한다. 앞의 영화가 멜로라는 장르의 그릇에 ‘개인의 구원’ 문제를 담았다면, 뒤의 것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에 ‘사회적 구원’을 얽어 놓았다. 표면적으로는 상업적 장르영화일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두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인간에 대한, 매우 정밀한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했던 것이다.

[혈의 누]가 제시하는 이미지와 소리가 더없이 참혹한데도, [혈의 누]를 엽기영화로 분류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참혹함은 곧 ‘인간사’의 알레고리라는 점을 영화는 거듭, 효과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무도 선하지 않고, 동시에 누구도 악하지 않다. 때때로 누군가가 선했다면 그것은 이익을 위해 그랬으며, 또 누군가가 악했다면, 다만 상황판단을 잘못했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선과 모든 악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는 사랑, 생명, 생업처럼 인간의 원초적 삶과 연관되어 감히 나무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누구를 죽이기도 하고, 목숨을 부지할 양으로 은인을 모함하는가 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 인간적 의리를 팽개쳐버리는 섬마을 사람들의 이력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삶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고 말하는 영화가 [혈의 누]이다. 까닭에 [혈의 누]에 등장하는 ‘인간’들을 보는 관객은 불편하다. 피를 쏟고 머리가 깨지는 끔찍한 모습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염치없음, 위선 따위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어서 그렇다.

관객들이 흥미롭게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장르의 법칙을 차용한 다음, 그 속에 말하고자 하는 감독의 발언을 세련되게 녹여냈다는 점에서 [혈의 누]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거머쥔 영화로 읽힌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연급으로 설정된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 속 인물들에 마땅히 밀착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혈의 누]는 가능성은 충분했으나, 대작에 이르지 못한, 잘 만들어진 보통영화로 보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