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광주가 패배감을 극복하고 진실을 회복하는데 문화운동의
역할은 매우 컸다. 신군부 권력은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이에 작가들은 시와 소설, 그림과 노래를 통해서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고
기꺼이 탄압을 감내하였다. 따라서 그 시대에 펜과 붓은 칼이자 총이었고, 금남로에서 부르던 노래는 펄럭이는 진군깃발이기도 하였다. 80년대
문화운동에 오월노래, 오월문학, 오월미술, 오월연극 등의 오월을 공통분모로 붙이는 이유가 이러하다. 만약 시와 노래, 음악과 미술이 없었더라면
진정 우리가 그 어둠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을까싶다.
오월미술에서도 시대와 함께 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목판화운동을 중심으로 걸개그림 및 벽화에서 거둔 시대적 역할과 예술적 성과는 두드러졌다. 항쟁 직후 오월미술에 담긴 광주의
초상은 참혹하였다. 어스름한 그믐달아래 학살된 시민의 시신이 봉분처럼 쌓은 이준석의 [인산(人山)](1985,목판, 29×24.5cm)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칼로 새긴 김경주의 [망월](1987,목판,59×40cm)은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처럼 초기 오월미술은
광주학살을 증언하고 죽은 이를 진혼하는데 진력하였다. 따라서 작품의 분위기는 무거웠으며 패배감이 짙게 깔려있었다.
오월미술을 회상하는데 문득「518m 광주학생협동화」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광주지역 초·중·고교학생들이 제작하여 금남로(2003.5)와 망월동신묘역(2004.5)에 전시된
오월연작그림이다. 오월을 경험하지 않는 세대에게 오월이 어떻게 계승되고 재현되는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매우 흥미롭게 살펴본 기억이
난다. 하나하나의 작품이 모두 좋았지만 특히 광주교육대학교부속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그린 [광주십장생도]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하늘에는 빨간
해가 빛나고 학이 나비가 날고 있다. 무등산에는 산신령이 구름을 타고 다니고, 파란 광주천에는 거북이 노닌다. 소나무 등걸에는 노란 날개를 가진
매미가 울고, 그늘 밑으로 사슴을 탄 사람이 보인다. 바람결에 분홍빛 구름이 상서롭고, 큼직한 바위 곁으로 무궁화도 예쁘게 피었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광주의 정경을 본
기억이 없다. 25년 전 끔찍한 살육과 공포, 목숨을 건 저항과 투쟁의 소용돌이였던 오월광주가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광주십장생도]에는 80년 오월 그 짧았던 대동세상이 재현되고 있었다. 특별법과 보상금으로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오월의 상처가 씻기는 것
같다. 진정 광주십장생을 꿈꾸는 어린학생의 눈에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없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천년만년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오월만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