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오월을 꿈꾸며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오월을 꿈꾸며
  • 배종민
  • 승인 2005.05.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종민의 미술세상]

청년이 된 오월광주

▲ 80,90년대 집회와 투쟁의 현장이었던 전남대 제1도서관(일명 백도)에 걸린 "오월에서 통일로" 걸개그림. 이 그림은 전남대 그림패 "마당"이 그린 것으로 남녀가 양쪽에서 성조기를 찢는 장면이다. 1988년 엠보천에 유성도료.11×37mⓒ배종민 금년으로 광주민중항쟁 25주년이 된다. 사람으로 치면 어엿한 청년이 된 셈이다. 25세의 청년이라면 어설픈 사춘기도 지나고, 대학이나 군대도 마쳤을 나이이다. 바야흐로 패기만만한 자신감이 넘쳐나고, 생명력은 약동하여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뭇 시인들은 즐겨 인생의 황금시대로서 청년을 노래하였다. 한편, 당시 피 끓던 청년들은 이제 50대에 접어들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맞이하는 청년 오월은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오월과 더불어 지난한 세월을 함께 한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1980년대 전반까지 광주민중항쟁은 ‘내란음모에 의한 폭도들의 무장난동’으로 매도되었다. 언론에서는 ‘불온한 광주사태’라는 신군부의 시각을 대변하고 재생산함으로써 광주를 고립시키고 오월의 진실을 은폐하였다. 그러나 19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오월광주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국회 광주청문회가 전국에 생중계되고(1988.11.18-1989.2.24) 1993년 정부의 공식입장이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수정되었다. 그 결과 광주 도청과 금남로 망월동은 매년 오월이면 국내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시대의 어둠을 밝힌 오월미술 ▲ "인산(人山)" 이준석 작.1985.목판.29×24.5cm ⓒ사진 배종민
오월광주가 패배감을 극복하고 진실을 회복하는데 문화운동의 역할은 매우 컸다. 신군부 권력은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이에 작가들은 시와 소설, 그림과 노래를 통해서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고 기꺼이 탄압을 감내하였다. 따라서 그 시대에 펜과 붓은 칼이자 총이었고, 금남로에서 부르던 노래는 펄럭이는 진군깃발이기도 하였다. 80년대 문화운동에 오월노래, 오월문학, 오월미술, 오월연극 등의 오월을 공통분모로 붙이는 이유가 이러하다. 만약 시와 노래, 음악과 미술이 없었더라면 진정 우리가 그 어둠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을까싶다.

오월미술에서도 시대와 함께 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목판화운동을 중심으로 걸개그림 및 벽화에서 거둔 시대적 역할과 예술적 성과는 두드러졌다. 항쟁 직후 오월미술에 담긴 광주의 초상은 참혹하였다. 어스름한 그믐달아래 학살된 시민의 시신이 봉분처럼 쌓은 이준석의 [인산(人山)](1985,목판, 29×24.5cm)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칼로 새긴 김경주의 [망월](1987,목판,59×40cm)은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처럼 초기 오월미술은 광주학살을 증언하고 죽은 이를 진혼하는데 진력하였다. 따라서 작품의 분위기는 무거웠으며 패배감이 짙게 깔려있었다.

▲ "망월" 김경주 작. 1987.목판 59×40cm ⓒ사진 배종민 오월미술에서 패배주의적 관점이 극복되기 시작한 것은 1983년부터였다. 홍성담은 [대동세상Ⅰ](1984,목판,55.5×41.8cm)에서 시민과 시민의 공동체로서 광주를 형상화하였다. 그는 만세를 외치듯 총을 치켜든 시민군과 김밥을 나누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통해 낙관적 전망으로 해방광주를 그려낸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가속시켰다. 전남대학교 그림패 마당은 중앙도서관 전면에 남·여 두 사람이 양편에서 성조기를 찢는 장면이 담긴 [오월에서 통일로](1988, 엠보천에 유성도료, 11×37m)라는 대형 걸개그림을 내걸면서 충격을 주었다. 한편, 오월미술운동에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 1989-2002)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광미공은 민족미술을 화두로 광주전남지역의 청년작가들이 결성한 미술단체였다. 이들은 [오월전]을 중심으로 오월광주를 미술로 형상화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금남로와 망월묘역에서 거리전을 열어 시민과 예술적 성과를 공유했으며, 때로는 작품이 탈취당하는 고난도 기꺼이 감내하였다. 현재 광미공은 해산되었지만 매년 오월이면 [오월전]은 지속되고 있다. 아름다운 오월의 꿈 : 광주십장생도 ▲ 광주교육대학교 부속 초등학교 학생들이 그린 "광주십장생도"ⓒ사진 배종민
오월미술을 회상하는데 문득「518m 광주학생협동화」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광주지역 초·중·고교학생들이 제작하여 금남로(2003.5)와 망월동신묘역(2004.5)에 전시된 오월연작그림이다. 오월을 경험하지 않는 세대에게 오월이 어떻게 계승되고 재현되는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매우 흥미롭게 살펴본 기억이 난다. 하나하나의 작품이 모두 좋았지만 특히 광주교육대학교부속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그린 [광주십장생도]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하늘에는 빨간 해가 빛나고 학이 나비가 날고 있다. 무등산에는 산신령이 구름을 타고 다니고, 파란 광주천에는 거북이 노닌다. 소나무 등걸에는 노란 날개를 가진 매미가 울고, 그늘 밑으로 사슴을 탄 사람이 보인다. 바람결에 분홍빛 구름이 상서롭고, 큼직한 바위 곁으로 무궁화도 예쁘게 피었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광주의 정경을 본 기억이 없다. 25년 전 끔찍한 살육과 공포, 목숨을 건 저항과 투쟁의 소용돌이였던 오월광주가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광주십장생도]에는 80년 오월 그 짧았던 대동세상이 재현되고 있었다. 특별법과 보상금으로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오월의 상처가 씻기는 것 같다. 진정 광주십장생을 꿈꾸는 어린학생의 눈에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없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천년만년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오월만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