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색 권투영화
세가지 색 권투영화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05.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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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기자의 영화읽기]주먹이 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 록키

[주먹이 운다]를 봤다. 재미있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가장 잘 만든 ‘유승완표’ 영화로 읽혔다. 권투와 관련한 다른 영화 몇 편이 떠올랐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영화로는 [밀리언달러베이비](클린트 이스트우드, 2004)가 있겠고,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록키](존 G. 아빌드슨, 1976)가 빠질 수 없다. 이들 영화 말고도 권투영화는 더 있지만,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작품을 기준 삼는다면 세 영화가 독보적이다.

▲ 주먹이 운다, 최민식 쩨쩨하고 구질구질한 이곳에서의 삶을 탈출하기 위해 권투를 선택한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세 영화는 모두 같은 색깔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의 무대로서 도시가 제시된 점도 공통분모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다른 점은,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세 편의 영화는 다양한 짝짓기의 방식으로 비슷하거나 혹은 다르다. 미국영화 두 편이 ‘개인’에 집중했다면, [주먹이 운다]는 ‘관계’를 좀더 깊이 파고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주먹이 운다]는 확실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밀하고 오묘한 관계망을 무리 없이 잘 표현해냈다. [록키]와 [주먹이 운다]가 희망에 천착한 영화라면, [밀리언달러베이비]는 절망의 풍경을 그려낸다. [록키]와 [주먹이 운다]가 가족의 의미를 여러 번 곱씹게 만든 영화라면, [밀리언달러베이비]는 ‘자연가족’이든 ‘사회가족’이든 거기에 기대지 마라, 결국 내 몸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는 진술을 정말로 잔인하게 내 뱉는 작품이다. ▲ 주먹이 운다, 유승범

[주먹이 운다]와 [밀리언달러베이비]는 인생을 이야기하려는 욕심이 가득한 영화다. 반면에 [록키]는 스타일이 화려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앞의 영화 두 편을 보고 나면 배우들이 눈동자가 기억에 남고, [록키]를 보고나면 주인공의 근육과 주제음악이 한동안 기억의 언저리를 맴돈다.

여성들이라면 [밀리언달레베이비]에 감동할 테고 남성들이라면 [주먹이 운다]에 많이 공감할 것으로 짐작된다. [밀리언달러베이비]의 주인공이 여성이어서라기보다는 그 여성을 후원하는 두 명의 나이든 남자가 감동의 진원지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주먹이 운다]는 20대와 40대라는 인생의 터닝포인트 연령대를 내세워 그 나이의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선을 건드리고 있다. 감정선의 내용은 ‘절망의 극한’, 까닭에 감독은 권투시합 장면을 ‘액션’으로 처리하지 않고 오기와 깡, 집념의 드러냄으로 연출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록키]가 만들어지면서 첫 번째 [록키]의 ‘웰메이드’가 폄훼되기는 했지만([람보]도 같은 구조다), 어쨌든 [록키]는 아메리칸 드림, 가족, 액션, 영웅 만들기 따위의 고전적 아이템들이 아주 잘 버무려진 영화로 평가할 수 있겠다.

텍스트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밀리언달러베이비]가 제일 앞선 것으로 이야기되는데, 여주인공의 절망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선량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여주인공 가족의 몰상식함을 설정하는 방식은 세련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해피엔딩’을 마침내 포기해버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뚝심이 인상적이었다.

[주먹이 운다]의 텍스트가 깊이 면에서 가장 많은 별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두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인간 유형들은, 단순히 두 주인공을 위한 액세서리에 그치지 않고, 나름의 이유를 가진 채 스크린을 누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주먹이 운다]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제각각 주인공들인 것이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가족 관계 설정이 조금 ‘오버’ 한 것 같아 아쉬웠다.

[록키]는 확실히 그 텍스트가 엷다. 이야기는 단선적으로 전개되고 카메라는 주인공으로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끝내 록키가 권투경기에서 이겨버렸다면 삼류가 됐을 텐데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애드리안’을 외치는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품격을 지켜주었다.

세 영화는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생은 정글이며, 나는 그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정글을 헤쳐 나가는 가장 큰 힘은 가족에게서 나온다, 고 말하는 작품들이다. [밀리언달러베이비]만이 ‘실상은 가족도 아니야’라고 비튼다. 하지만 그 비틈은 역설적으로 가족의 의미를 더 생각하게끔 만드는 역할을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후천성 아버지’이지 않겠는가. 결국 세 영화를 관통하는 공통의 말은 ‘정글과 가족’인 셈이다.

그래서 세 영화의 장르분류는 액션이 아니라 드라마다. 권투의 탈을 쓴 인생영화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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