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극장에서 '2004년에 놓치기 아까운 영화 15편'
광주극장에서 '2004년에 놓치기 아까운 영화 15편'
  • 김영주
  • 승인 2005.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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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 감독과 임상수 감독을 떨떠름해 하기 때문에, [공공의 적2] [그 때 그 사람]이 화제에 크게 올랐지만 비디오로 보기로 하고, 광주극장에서 상영하는 ‘2004년에 놓치기 아까운 영화 15편’에서 10편을 보았다.

만화영화 [천년여우]를 가장 감흥하였다. [퍼펙트 블루]에서 콘 사또시 감독에게 반해서 그를 기어코 다시 만났다. [퍼펙트 불루]보다 훨씬 좋았다. 장면장면마다 열광했다. 이런 영화 하나를 만나려고 얼마나 많은 시덥지않은 영화에 시달렸는가! 이런 영화는 광주극장의 그 큰 화면으로 보아야 제 맛이다. 충만감으로 황홀했다.

"영화 한편 만나려고 시덥지않는 영화 15편을 봤다"
 
[삼사라]는 티벳불교의 윤회이야기이다. 티벳지방의 풍광과 풍습을 가장 환상적이면서도 실감나게 만났다. 화면을 정성스럽게 잡아내어 깔끔하게 단장하였다. 야한 장면이 조금 불만은 있지만 천박하지 않게 틈틈이 끼여들어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끌고 간다. 임권택 감독의 한국관광홍보용 영화 같은 드높은 사명감과 훈계하는 고지식함이 없어 좋았다.

이제부터 이 뒤로는 비디오로 봐도 암시랑 안할 영화들이다. [조제, 호랑이 ... ]는 여린 감성을 건드는 사랑영화이다. [붉은 다리 아래 ... ]는 잔뜩 늙어버린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회한 같기도 하고 쑥스럽고 풋웃음 나는 완전 ‘개똥철학’ 같기도 하다. 섹스를 소재로 너무 평범하지만 몰래 숨겨온 말을 은근한 블랙코미디로 내뱉는다. 노인네가 주책이라며 헛웃음이 나오지만, 그냥 무시해버리기엔 뭔가 캥긴다. 어찌보면 무지 싱겁다.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웨일 라이더]는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광과 원주민의 생활풍습을 엿보고 싶어 굳이 보았는데, 기대 이하로 싱거웠다. 잔잔하고 편안해서 착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클린]은 락음악과 마약 그리고 문란한 생활에 빠진 장만옥이 자기 삶을 다잡아 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체게바라의 젊은 날이 궁금해서 보았다. 아기자기함이 없지 않지만, 일기체의 사건 나열이 전체적으로 단조롭다. 모두 교육적으로 훌륭한 교훈을 주는 영화이기에, 그리 별 볼 일 없다고 말하면 욕먹기 십상이기에 부담스럽다. 이런 건전한 이야기에 나는 또 다른 억압이나 허울을 느끼기에, 더 별 볼 일 없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김기덕 감독의 [빈 집]은 [봄 여름 ... ]이후로 그의 무지막지하게 혹독스런 엽기장면이 눈에 띄게 수그러든 영화이다. 그 이전 영화는 그 극렬한 엽기성으로 크게 비난하였고, 그 이후 영화는 내공이 얕고 숙성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영화가 온통 기발한 아이디어 덩어리이다. 그 기발함이 마치 무슨 깊은 암시가 있는 것처럼 보여 거창한 작품성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한국영화가 세계에 떠오르면서, 유럽 사람들 특히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린 진보적인 예술계의 정신분열환자들에게 동아시아의 뒤틀린 아이디어가 독특해서 어필한 것 같다. "'빈집'은 기발한 아이디어 덩어리" ▲ ⓒ빈집
[나쁜 교육]은 카톨릭 신부와 어린 남자아이와의 동성연애와 성폭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가 싫었다. 특이한 소재를 특이한 방식으로 끌고 가면서, 무슨 금기의 영역을 건들며 어떤 문제의식을 가진 채 하는 위선적 작위와 허세스런 기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장선우 감독과 임상수 감독을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법 갖춘 기능적 재능으로 시니컬하게 무슨 사회문제의식을 심각하게 고뇌하는 것처럼 자꾸 거창하게 똥폼을 잡는다. 그냥 순순하게 끌고 가면 될 껄, 유별나게 비비꼬아서 뒤튼다. 그리고 무슨 천재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로 그걸 즐긴다. 현대 예술의 진보적 작가에게서 이런 모습을 흔히 본다. 현대의 진보적 예술에서 이런 사이비들이 주로 주름잡고 설치기 때문에 더욱 싫다.

[미치고 싶을 때]는 지겨웠다. “[뽕네프의 연인]같은 냄새가 나는 이런 영화가 젤로 싫어, 언제 끝나지? 그만 볼까? 아휴 지겨워!” 세상만물과 만사가 모두 그 나름으로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극단적으로 막무가내 삶으로 맨날 일통만 내는 '또라이' 삶을, 그 알량한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로 미화하며 훈계하려드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올드 보이]처럼 기능적으로 잘 만든 영화도 아니다. 도대체 베를린 영화제에서 어떤 근거로 이런 영화에 최우수작품상을 주는지 알 수가 없다. 유럽 영화제에서 큰 상을 타는 영화는 대중성이 없다. 문제는 작품성인데, 현대 예술의 병적으로 뒤틀린 미감이 그 기준이다. 그 뒤틀린 미감을 기준으로 인정하고 보아 작품성이 있는 영화도 있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영화들도 제법 있다. 이런 영화가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는 걸 보면, 지금 서양문명은 병들어 뒤틀리고 비뚤어져 있음에 분명하다는 확신이 든다.

"'미치고 싶을 때'는 뒤틀린 서양문명"

지금 서양문명은 보수적 문화이든 진보적 문화이든 모든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지구촌을 총체적으로 수렁에 빠뜨리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그 씨앗은 극단적인 선악의 대립이 깔린 서양이분법적 사고틀이며, 학문적 헬레니즘과 종교적 헤브라이즘에 깃들어 있으며, 오늘날 그 구체적인 열매가 극렬한 네오콘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기계문명과 이를 떠 받치고 있는 ‘뉴튼패러다임’이다. 수학과 계량통계학은 그 첨단무기이다.

니체에서 푸코, 데리다,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피카소에서 백남준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상과 현대예술는 이렇게 서양문화와 현대기계문명에 깔린 이데올로기적 음모와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치게 비비꼬여서 그로테스크하게 자학적으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면서 이야기하니까, 일반사람에게는 아리송하고 어지럽고 해괴하게 보이는 것이다. 현대사상과 현대예술도 또 다른 서양 이분법의 극단성이라는 잘못된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반사람의 눈높이를 벗어나서 ‘천재라는 뻔질한 허울’을 뒤짚어 쓰고 즈그들만 잘난 체하고 똥폼잡는 허세와 허위도 큰 잘못이다.

   
▲ ⓒ미치고 싶을때
"동서양문화 극복할 문화사상운동 필요"

그렇다고 동양음양법에 의한 동양사상이 그 대안으로서 적절한 역할을 해내지도 못하고 있다. 동양사상은 애매모호하다. 오늘날처럼 동양학이 쇠퇴한 상황에서는, ‘사이비 학자’나 ‘신비주의적 돌팔이’가 기승을 부리게 하는 터전을 마련해 준다. 누가 사이비이고 무엇이 혹세무민인지, 스스로도 모르거니와 남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늘날 동양학문은 전반적으로 품격 자체에 문제가 있다. 게다가 천형(天刑)처럼 벗어나기 힘든 서양 학문의 색안경 그리고 오늘날 동양학문의 품질 저하가, 한꺼번에 수렁에 빠져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동양문화에 관심이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것은, 이러한 동양문화의 재생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60년대 월남전 반대 운동과 민권운동에서 비롯한 히피 문화와 뉴에이지 운동의 물결에 닿아 있다. 그 밑바닥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핵무기와 환경 파괴 등에서 비롯된, 서양 기계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서양 스스로의 반성도 연결되어 있다. 100년-200년 전에 서양문화에 뒤통수를 맞아 기절한 동아시아 문화권이, 각고의 노력 끝에 스스로 회생하는 기적을 보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생적 재생은 시류의 편승에 지나지 않기에, 자기 반성이 철저하지 못하고 자력갱생의 내공과 저력을 갖지 못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동시에 극복하는 ‘새로운 문화사상운동’을 펼쳐야 한다. 그러하려면 먼저 서양문화 사대주의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총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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