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김일의 인기 뒤에는 항상
역도산이라는 이름이 영웅의 대명사로 뒤따라 다녔다. 우리의 영웅 역도산이 일본놈 깡패에게 칼 맞아 죽었다고 했다. “일본놈 개-시끼!”라는
막연한 욕설로 ‘막무가내 민족사랑’을 불태웠다.
어린 시절의 무턱댄 영웅이 이 어른시절엔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김일 레슬링
중계와 영화가 마구 떠올랐다. 만화 [타이거 마스크]와 싸우던 선수들의 묘기나 무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역도산이나 김일로 우리나라를
무시하지마라는 악바리 근성을 불태우던 시절. 그래서 서양이나 일본에게는 열등감을 깊이 감추었고, 우리에게는 그렇게라도 스스로 위로하고 싶었던
시절.
우리는 그런 유치한 열등감과 억지 자위로 맨땅에 헤딩하며 깡다구로 일어서서, 이제는 우리도 이 만큼 먹고 살게 되었고 그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민주화의 새벽을 열게 되었으니, 그 시절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막무가내 나라 사랑’을 지금은 터놓고 되돌아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도산]은 그의 일대기를 있는 그대로 주워 모아 놓은 논픽션 같았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설움 받다가 그렇게 출세했으며 그렇게 무너지고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구나! 그런 역도산의 생애에 푸욱 빠져들지 못하였다. 그런
설움과 역경쯤은 내 삶에 양념 발라 뻥쳐도 만들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못 봐줄 영화는 아니다. 그의 겉재능은 보아줄만한 괜찮은 영화이다. 간노회장에게 눈길을
받으려고 생명을 거는 치열한 승부수에서 역도산의 설움에 겨운 집념이 사무치게 다가오기도 한다. 스모의 좌절을 딛고 레슬러로 백인을
때려눕히는 컴백홈은, 2차대전의 참패로 무겁게 가라앉은 일본을 사꾸라꽃 피우듯이 환호작약으로 타오르는 열광의 도가니를
일으킨다.
60년대 가난으로 찌들린 우리나라에 김일 레슬링의 박치기, 그리고 70년대 지역차별의 설움으로 짓눌린 전라도에 대통령배
고교야구에서 김윤환의 3타석 연속홈런, 그리고 온 지구촌에 이젠 가난의 멍에를 훌훌 벗어던져 보이고픈 지난 월드컵 16강 8강 4강 진출의 붉은
악마로 출렁이는 인해물결. 그대로 빼어 박았다.
유난히도 그 장면이 우리 60년대 김일선수의 박치기 장면하고 너무나 빼다 박아선지,
그 때 그 시절에 그대로 오버랩 되어 울컥한 감동이 밀려왔다. 설경구의 고생스런 연기도 대단하다. [오아시스]의 삐쩍 마른 삐딱함을
기막히게 연기해낸 설경구가 이번엔 거대한 몸집의 악착스런 승부욕을 비지땀으로 고생스레 연기해낸다.
그의 일본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미묘한 감정의 터치까지도 실어 담았다. 그러나 장동건이 [친구]에서 깊었으나 [태극기...]에선 고생스러웠듯이, 설경구도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에서 그지없이 깊었으나 [역도산]에선 너무나도 고생스러웠다.
간노회장의 연기가 [감각제국]에선 그러려니 하였는데, 이번엔
그가 소름끼치게 다가왔다. 나는 닳고 닳아진 음모가의 무표정한 얼굴에 얇게 내려 깔은 눈두덩 아래로 보일 듯 말듯 흐르는 눈초리를 칠흙밤에
도사린 호랑이의 시퍼런 눈빛보다 더욱 몸서리친다.(썬그라스에 숨은 눈빛은 아주 싫어한다.)
그의 얼굴과 몸짓은 얼음장을 매서운
칼바람처럼 스치는 간악한 카리스마의 극치를 드러내는 예술이었다. 안으로 깊이 움츠려드는 ‘축소 지향형의 일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연기이겠다.
설경구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오르내리는 연기로 보이고, 간노회장은 감독의 역량을 넘어서는 연기로 보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삶이 깃들면, 그냥 그대로의 산과 물이 아니다. 그런 세상에 배어든 자기의 관점과 색깔을 담아야 한다.
[역도산]에는 그게 없었다. 수많은 스타탄생의 신화에 또 하나를 주워 담아 펼쳐 보였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