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회 종료 1시간을 남기고
정기회 종료 1시간을 남기고
  • 강기정
  • 승인 2004.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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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죄송합니다. 그러나 너무 화가 났습니다.

17대 국회 본회의장에서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습니다.
정말로 담담해야지 라고 몇 번을 다짐했는데 감정이 앞섰습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것을 두고 ‘부끄럽지는 않으나 결코 자랑할 일은 아니지’라며 살아왔습니다.
혹시라도 민주화 운동 팔아 정치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일부 인사를 두고 ‘광주 5,18’을 팔아 정치하고 일신의 영달을 꽤했다는 말을 많이 들어 온 저로서는 늘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서는 혹시라도 민주화 운동 경험자들이 ‘경제도 어려운데 개혁만을 외친 사람’으로 비춰질까 하는 마음에 우리 386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심정으로 의원직 활동을 해왔습니다.
경제인과 관료의 의견을 늘 경청하고 그 입장에 서 보았습니다.
의총에서도 먼저 발언하기 앞서 선배 및 동료의원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발언하고 주장할 땐 거듭 검토하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과정에서, 특히 한나라당의 이철우 의원에 대한 간첩 발언 사건을 접하며, 지금까지의 평정심이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17대 첫 정기국회를 국민에게 희망보다 실망으로 다가가게 했다는 점에서 저 역시 자유스러울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양심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지난날 독재자의 공안검사 출신들에 의한 백색테러에 우린 넋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공포, 전율이었습니다.
참다 참다 일어서서 항의하고 울부짖었습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차디찬 지하에서 고문으로 신음할 때 우리를 제물로 권력을 휘두르고, 자리를 보전하던 공안 검사 출신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본회의장에서 또다시 백색테러를 가하고, 국회를 모독하고, 국민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정형근 의원을 보면서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함께 토론하고 회의하고 국감을 지내면서 애써 과거의 모습을 뒤로하고, 현재의 정형근 의원을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생각은 순진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채 서있었습니다.
단지 우리들의 마음이 퇴색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악랄한 그들의 모습에 정말이지 어제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Ⅱ. 허탈했습니다. 그러나 슬펐습니다.

10여년 전의 일을 가지고 생 때 부리는 그들에게서 느끼는 분노가 시간이 갈수록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많은 의원들이 울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자꾸 과거가 생각났습니다.
감옥에서 보낸 한겨울이 생각나고, 수사관들 앞에서 벌거벗겨진 채 무기력하게 어쩌지도 못한 그날의 악몽이 회상되면서 눈물이 막 흘렀습니다.
수십년을 감옥에 산 친구를 생각하면서 우는 의원도 있었겠고, 국보법의 칼날 아래서 어느날 갑자기 사형당한 동지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의원도 있었을 겁니다.

어제까지 목욕탕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보기도 싫어 졌습니다.
정치인이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함께 술 먹는다’고 합니다만 저는 오늘 본회의 장에서 한나라당 의석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속 좁은 제 마음인지 모르겠으나 당분간은 수인사도 없을 듯 싶습니다.
사람이 정말 미워졌습니다.

Ⅲ. 분노했습니다.

본회의장 계단에 모여 구호도 외쳐보고 규탄사도 했습니다만 후련하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국보법을 논의할 법사위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점거 당한 채 회의를 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제부터 법사위원회 회의실은 국보법을 목숨처럼 지키겠다는 김용갑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사랑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곳에서 자고, 먹고, 놀고 있습니다. 본회의가 열린 시간에도 본회의를 불참하고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당의 어느 의원은 ‘그들이 평생 국보법의 낡은 유물과 살라며 문 밖에서 못질을 해버리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토론도 거부한 그들에게 해줄 말이 없습니다.
여전히 음지와 습기찬 곳을 좋아 한 자들이라 국민과 함께 시시비비를 가리고 토론하는 정상적인 의회문화는 그들의 체질이 분명 아닙니다.

Ⅳ. 국보법뿐 아니라 경제 민생법도 챙기겠습니다.

국보법 폐지에 대한 우리당의 원칙은 조속히 폐지하는 것과 충분히 토론하자는 것입니다.
천정배 대표의 조건부 제안도 있었으나 이러한 원칙은 다수의 의원들과 당원들의 생각입니다.
다른 의견들도 많겠으나 ‘국가보완법 폐지 후 형법 보완’은 저의 절절한 심정입니다.
오늘 그래서 몇 의원들과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천정배 대표의 조건부 연내처리 유보 방침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처럼 민생입법을 위해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경제를 하루 빨리 회생시키는 일은 시급하고도 중요한데 그와 관련된 법이 산적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본회의 장에서 100여개의 법안을 처리했으나 여전히 시급히 처리할 법안이 61개나 남아 있습니다. 그중 민주개혁 법안 22개를 제외하더라도 민생경제 관련 법안은 31개나 됩니다.
투자활성화를 위한 민간투자법, 소득세법, 기업활동규제완화 관련법 등 입니다.

한나라당은 임시국회 소집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개혁입법저지를 위해 아예 국회를 열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임시국회는 열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예산안 뿐만 아니라 중요 법안이 지체되지 않고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정기회 종료 마지막 1시간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과 이상락 의원 사퇴서 처리를 앞두고 있습니다.

* 끝내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은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30분 정회를 요청한 한나라당은 끝내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 처리를 놓고 의원 전원이 토론할 수 있도록 한 전원위원회 소집 동의서를 제출한 민주노동당 역시 회의장에 들어 오지 않고 있다 안건처리가 무산되니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정기회의는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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