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맹 의상실 문광자 원장, 장기수 3명 정신적·재정적 후원 역할
문 원장이 이들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0년 5·18직후 광주교도소에서 실시한 신앙교화프로그램이 계기가 됐다. 당시 문 원장은 광주 동명교회 집사로 ‘성경공부팀’에 끼어 이들 선생들과 9개월 남짓한 만남을 가졌었다.
그리고 이들 장기수들이 출소 후 자신을 찾아왔을 때 전혀 싫은 내색 없이 받아들였다. ‘빨갱이’라면 가족친지들까지도 외면하던 상황에서 집도절도 없고 비빌 일가붙이 하나 없던 이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이들 선생들도 어려운 시절, 자신들을 격의 없이 품어준 문 원장을 ‘은인’으로 표현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다.
80년 광주교도소 첫 인연…출소 이후 신원보증·숙소, 일자리 제공
김찬영·이정준씨 생활적 독립…이광근씨 14년째 미싱사로 한솥밥
북한어린이를 위한 사랑모으기 공연 위해 드맹아트홀 무료로 대여
이들 가운데 김 선생은 일찌감치 신앙의 길로 들어서 현재 목사로 재직중이며 이 선생도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장로활동을 하고 있어 이미 남쪽에 삶의 뿌리를 내렸다. 다만 뒤늦게 합류한 이 선생만 문 원장이 운영하고 있는 의상실에서 14년째 미싱사로 일하며 한솥밥을 먹고 있다.
이쯤해서 문 원장이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에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상범들에게 선뜻 두 손을 내민 이유가 궁금해졌다. 제아무리 신앙인 이라고 하지만 보통 용기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해 문 원장은 “당시 상황에서 장기수들의 보증을 서는 일은 정말 두려운 일이었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거창한 생각이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 원장은 또 “세분의 선생들에게 그 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기회를 주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마음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뜻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전하자는 취지”에서다.
문 원장은 또 9년 전 광주시 동구 사동에 드맹 아트홀을 건립하면서 자신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 자신의 집을 지을 때 일정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환원해 사회와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딱히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하자는 차원은 아니었고 처음엔 나를 위한 공간쯤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간이 여러 의미 있는 쓰임새로 활용되고 있어 보람이다.
문 원장은 또 최근 하와이 박물관 초청전시에 이어 파리 문화원 전시가 예정돼 있는 등 디자이너로서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고 조만간 우리나라 전통무명에 대한 천연염색을 소재로 패션도서도 발간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문 원장은 “책을 내는 것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책을 낼만큼 공력은 됐다고 생각한다”며 “책 속에 38년 드맹의 역사와 내 생활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소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일은 우리에게 항상 희망적이다.”
38년 전 문 원장이 디자이너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당시 마음속에 품었던 ‘드맹(Demain)’이란 ‘내일’의 희망이 지금 화려하게 그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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