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이 남긴 것-'탄풍'이 ‘박풍’을 넘었다
17대 총선이 남긴 것-'탄풍'이 ‘박풍’을 넘었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4.1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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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원내 과반정당 등극…19년만에 여대야소 재현

50년 정통야당 민주당 몰락·민주노동당 50년만에 원내진입
선거 막판 지역주의 망령 고개…호남 탈 지역 가능성 확인
JP 10선고지 등정 실패…한국정치 쥐락펴락 3김정치 퇴장
참배·삼보일배·삭발 단식·당사이전 등 ‘이벤트’ 정치 난무
탄풍·박풍·노풍·추풍·신노풍 등 ‘풍(風)정국’ 총선 향배 결정

▲ 민노당 후보들이 5.18묘역에 참배하고 있다.ⓒ김태성 기자 17대 총선이 갖가지 진풍경과 기록을 남기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2주 동안 분주하게 표밭갈이에 나섰던 후보자들도 성적에 따라 희비의 쌍곡선을 그렸다. 열린우리당은 ‘탄풍’에 힘입어 원내 과반 정당에 등극했으며 민주노동당은 근 50년만에 원내에 둥지를 틀었다. 50년 정통야당의 계보를 자임해왔던 민주당은 겨우 9석을 얻는데 그쳐 민주노동당에게 제3당 자리마저 내주며 정치적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자민련도 김종필 총재의 10선 등정이 좌절되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됐다. 이번 총선은 또 그 어느 때보다 ‘이벤트 선거’로 기록될 만 하다. 그 중에서도 국립 5·18묘지는 단연 이벤트의 중심에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정치인들 때문에 몸살께나 앓아야 했다. 줄을 이었던 참배와 삼보일배, 그리고 삭발과 단식, 선대위원장 사퇴, 당사 이전 등은 이번 총선이 보여준 이벤트 선거의 압권이었다. 이와 함께, 이번 총선의 판세를 좌우한 것은 다름 아닌 ‘바람’이었다. ‘3·12 대통령 탄핵풍’으로 촉발된 이른바 ‘풍정국’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박풍(朴風)’,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풍(老風)’과 함께 이번 총선을 이끈 ‘3두마차’였다. 여기에 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의 ‘3보1배’로 뒤늦게 가세한 ‘추풍(秋風)과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사표’발언으로 선거막판에 돌출 된 ‘신노풍(新勞風)’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였다. 하지만 총선 정국에서 선거운동을 ‘쥐락펴락’ 했던 바람은 실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탄풍’은 ‘전국풍’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갔으며 ‘박풍’과 ‘노풍’은 ‘지역풍’으로 마감됐다. 간절한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추풍’은 ‘찻잔 속 태풍’으로 몰락했으며 ‘신노풍’은 감정의 골만 남기고 침잠했다. 그 결과 정치권은 사상 첫 ‘의회권력 교체’라는 정치지형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17대 총선으로 형성된 새로운 정치지형에 대해 알아봤다. - 여대야소의 탄생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해 과반 의석을 약간 상회하는 ‘여대야소’ 국회가 만들어졌다. 선거 막판에 최대 이슈로 떠오른 ‘거여견제론’과 ‘거야부활론’의 ‘기싸움’에서 ‘탄풍’이 진가를 발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선거전에 돌입한 이후 ‘박근혜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박풍’과 ‘노풍’을 양날개로 수도권 입성을 노렸지만 결국 ‘탄풍’을 넘지 못하고 ‘지역풍’으로 마감했다. ▲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당선 축하를 하고있다.ⓒ김태성 기자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은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탄핵국면의 전환을 위한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은 선거기간 동안 ‘소수여당’의 한계를 호소하며 개혁입법을 추진하고 참여정부의 국정 2기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여당이 안정의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를 홍보해왔다.

이로써 민정당이 1985년 12대 총선에서 전체 의석 276석 가운데 53.6%인 148석을 확보함으로 형성됐던 ‘여대야소’ 정국이 19년만에 재현 됐다. 12대 총선 이후 다섯 차례 총선이 진행됐지만 단 한차례도 과반 정당이 출현한 적은 없었다. 다만 1990년 ‘3당야합’ 결과 탄생한 민자당이 인위적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했을 뿐이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 승부처였던 수도권에서 선전했던 것이 주된 요인인 것으로 보인다.

- 민주노동당 원내진출과 민주당 몰락

1956년 진보당 이후 근 50년만에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한 것은 이번 총선이 거둔 최대 성과다. 이와 함께 50년 정통야당을 자임해왔던 민주당이 참패한 것도 이변으로 꼽힐 만 하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두 자리 의석을 차지하며, 9석을 획득하는데 그친 민주당을 제4당으로 밀어내고 당당히 원내 제3당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바야흐로 야당의 적자가 보수야당에서 진보야당으로 교체된 것이다.

조순형 대표체제의 출범과 함께 한때 정당 지지율 1위에 올랐던 민주당으로선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몰락은 이미 민주당 분당과정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징후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한·민공조’를 통해 대통령 탄핵에 앞장섬으로써 스스로 정체성을 허물고 몰락의 길을 자초한 것이다.

민주당은 탄핵안 가결 이후 정당 지지율이 3∼5 %까지 떨어지는 등 ‘위기론’이 급등하자 ‘추다르크’를 긴급 선대위원장으로 수혈했다. 이후 추미애 선대위원장은 ‘3보1배’를 통해 민주당 구원의 선봉장이 되는 듯했지만 결국 자신의 지역구에서마저 ‘패장’이 됐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천신만고 끝에 의회에 진출한 개인들의 정치적 거취로 명운을 달리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창당 4년만에 원내 3당의 지위를 획득한 민주노동당의 전도는 양양하기만 하다. 벌써부터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구호로 국회판도 변화에 새바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 미완의 지역주의 극복

17대 총선에서도 지역주의의 괴물은 여전히 괴력을 발휘했다. 대구와 부산지역에서 한나라당 일당독점의 성채가 워낙 견고했던 탓이다. 부산의 경우 18개 선거구 가운데 17개 곳을 휩쓸었고 대구는 아예 통째로 ‘싹쓸이’를 했다. 당초 본격 선거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지역주의가 그다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대두됐었다.

   
▲ 박근혜대표가 지난 3월28일 광주를 다녀갔다.ⓒ김태성 기자
대통령 탄핵으로 촉발된 전국민적 분노가 전국을 뒤덮으며 ‘탄핵심판’을 주요 축으로 하면서 ‘친노’ 대 ‘반노’의 대결구도가 보조 축을 형성한 것. 이 때문에 전통적인 지역주의가 ‘탄핵선거’ 앞에서 현저하게 힘을 잃고 약화되는 조짐이 감지됐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박근혜 대표를 앞세워 위기 탈출구를 모색하면서 지역주의의 망령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한 ‘TK’풍이 ‘박정희 향수’에 힘입어 낙동강 전선을 건너더니 급기야 ‘PK’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영남을 교두보로 121석을 얻어 제1야당에 올랐지만 ‘영남 정당’의 이미지를 탈색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민주당도 ‘3보1배’와 ‘DJ향수’를 자극하며 지역주의의 감성에 호소했지만 호남지역에서 단 5석을 얻는데 그쳤다. 물론 ‘탄풍’과 ‘지역발전론’에 무임승차한 열린우리당 일색의 정치색은 완벽하게 극복되지 못한 호남 지역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하지
만 이 두 가지 현상은 호남 지역주의 극복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 JP, 10선 고지 앞 무릎…‘3김(三金)’ 역사 속으로

자민련 김종필 총재(JP)의 10선고지 등정이 끝내 무산됐다. 자민련 비례대표 1번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세운 최다 9선의 기록을 갈아치울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국 문턱 앞에서 고배를 마셨다. 자민련이 지역구 5석을 넘기지 못하고 정당득표율도 3%대를 넘어서지 못함에 따라 국회입성에 실패한 것.

이에 따라 지난 40년 가까이 한국정치사를 풍미해왔던 ‘3김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3김 퇴조’의 전주곡이었다면 17대 총선은 ‘3김 퇴장’의 후주곡 쯤에 해당된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경우 열린우리당이 ‘정치철학 계승’을 강조하고 있지만 민주당의 참패로 급속히 영향력을 상실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DJ가 ‘국내정치 불 관여’ 입장을 천명하고 그 동안 꾸준히 거리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민주당 몰락’고 ‘정치적 퇴장’을 등치시키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DJ의 장자인 김홍일 후보가 ‘대리인’을 자임하고 추미애 선대위원장이 ‘햇볕정책 승계’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지역에서 참패한 것은 곧바로 정치적 영향력의 축소로 이어질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와 함께, 동교동계의 몰락도 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YS의 처지는 더 참담하다. 문민정부의 황태자였던 차남 현철씨가 고향 경남 거제에서 출마했다가 중도하차 했으며 YS의 입을 자처한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도 공천에서 탈락한 뒤 무소속에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여기에 2000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에 불법 제공했던 자금의 출처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안풍 재판’이 그를 사면초가로 내 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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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순 2004-04-20 11:22:21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지 몰라도
제목이 좀 그렇네요
그동안 그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선거가 유권자와 후보자에게
얼마나 많은 쓸데 없는 영향을 주었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다음부터는 바람제목 그만 쓰시면 좋겠어요(시민의 소리에서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