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 간첩과 지낸 12년의 담담한 생활이야기
[송환] 간첩과 지낸 12년의 담담한 생활이야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4.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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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환
나는 '숭고하신 그 분'을 찬양하고 떠받드는 종교를 여러 가지 이유로 탐탁해 하지 않는다. 이상향을 지나치게 높이 두고 갈망하면서 회개하고 반성하자며 마구 몰아치는 건 더욱 싫다.

여기에 어떤 이념이나 종교에 기댄 권력들의 '구조적 음모'가 있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다. 게다가 거기에 잔뜩 빠져든 사람들이 보여주는 '지나친 결벽증'에서, '월출산 바우덩이'를 마주하는 답답함 그리고 "사흘 굶은 시엄씨"의 악착스러움이 느껴질 땐 지겨워진다.

때론 그 섬뜩함에 소름마저 돋는다. 내가 부시를 무지 싫어하고, 스탈린을 무지 싫어하는 것도, 그들에게서 '그 지나친 결벽증'에서 비롯된 '지나친 자기 집착'을 보기 때문이다. 서양문화가 세상에 넘쳐흐르는 걸 불길하게 여기는 이유도, 그 뿌리에 박힌 '선과 악의 극단적인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틀이, 인류를 '집단적인 자폐증'에 빠져들게 하여 '문명의 충돌'을 선동하며 '미친 피바람'을 불러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북한 공산체제. 어린 시절엔 박정희 정권의 극악한 반공교육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였지만, 이젠 부시나 스탈린이 내 개인적인 체질하고 맞지 않아서 싫고, 그 극우와 극좌가 맞부딪치면서 인류에게 저지른 극악스런 죄악 때문에 더욱 싫다. 간첩. 그들은 그 북한 공산체제를 숭상하고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의 사상을 싫어한다. 볼테르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당신의 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하여 목숨 바쳐 싸우겠다." 서양의 근대 문명이 인류에게 안겨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로 그 서양문명이 낳은 '이데올로기 냉전체제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희생양이 되었다.

[송환]은 그 간첩이 감옥에서 풀려 나와 북한으로 송환되기까지 12년간의 800시간 촬영분량을 2시간 반으로 줄여 만든 다큐멘타리이다. 김동원 감독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희생양에게 새겨진 개인적인 애환을 무척이나 담담하게 필름에 담아낸다. 몇 몇 장면말고는 담담하다 못해 무던히도 싱겁다.

그래서 "2003년 최고의 한국영화, 이 영화는 진품이다"는 거창한 찬사로, 무슨 별스런 재미가 있을 꺼란 기대는 아예 하질 마라. 갖은 양념에 기름진 맛이 결코 아니다. 아직 잘못된 반공교육의 허물을 벗지 못하였거나 쌈빡한 영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뭐 이런 게 다 있어!"하고 투덜거리며 한 시간도 기다리지 못할 영화이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희생양에게 새겨진 쓰리고 아린 세월의 깊은 상처를 견디어 낼 수 있거나, 그 무던히도 싱거운 담백미를 오히려 더 즐기는 사람에게는 참 좋은 영화이다.

조창손의 소처럼 꿈벅거리는 눈과 굵게 패인 귓밑 턱뼈 근육 그리고 어쩌다가 스치듯이 잠깐 배시시 짓는 미소. 김선명의 늙은 노모의 얼굴을 안고 애잔하게 들여다보는 하염없는 눈매 그리고 노모의 산소를 찾지 못하고 넋 나간 듯이 허우적거리는 걸음걸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가에 짜디짠 눈물이 배어든다. 김영식의 언행과 얼22굴표정은 글자 그대로 '순박함의 극치'이다. "이 지구상에 어머니들에게 정말 호소하고 싶은 것이, 아들을 낳으려거든 정말로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을 낳으라는거야~. 글고 구두 만드는 사람은 끄트머리를 좀 말랑하게 했으먼 조컷어~ 내가 구두 끄트머리에 맞아 다리가 다 이렇게 죽갔다고~"하면서 지금도 시커멓게 멍든 성문다리를 쑤욱 내 보인다. 먼저 간 동지의 무덤에 엎드려 절하면서, "씨벌 먼저 간다고 알려나 주고 가제, 땅속으로 들어가서 뭔 짓 하는 거여~"하며 욕설을 마구 퍼붓고 오만상을 다 찌푸린다.

애호박을 이웃에게 따주면서 "나는 왜 그런지 몰라~. 넘한테 막 주는 것이 왜 이렇게 좋은지. 그저 주고만 싶어~" 그를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값진 걸 잃어버렸는지. 마당이 좁아 낱낱이 말하지 못해서 그렇지, 김석형의 냉철한 꿋꿋함, 안학섭의 사색어린 천진함, ... 이 서로 얽히면서 추욱 가라앉아 흘러가는 분위기가 차암 우울하고 슬프다.

감독은 조창손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한다. 만나서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단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그저 흔해 빠진 이야길 하다가 그 표정의 조각들을 모아 붙이면 보일 일이다.

/김영주(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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