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말타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샤말타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3.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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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추방 저지·이주노동자 합법화 요구 여수서 단식농성 18일째>

 94년 네팔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불법체류자로 15∼16곳 전전
평등노조 이주지부 지부장 활동…인터넷 라디오21 방송 진행도
“많은 돈 못 벌었지만 많은 것 배울 수 있어서 한국생활 행복”

네팔 이주노동자 샤말 타파(Samar Thapa·31)의 ‘10년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이 아직도 ‘인권후진국’이자 ‘노동탄압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참담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 삭발하는 네팔 노동자 샤말타파 ⓒ김태성 기자
1994년 5월31일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네팔 산업연수생 제1진으로 입국한 이후 샤말의 ‘한국 살이’는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입국 8개월만에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뛰쳐나와 자유를 호흡하기도 전에 그의 이름에는 벌써 ‘불법체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샤말은 그 후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15∼16 곳의 작업장을 흡사 ‘떠돌이’처럼 전전했다. 그 과정에서 악덕업주를 만나 임금을 떼이기도 하고 99년에는 신문배달을 하다 트럭에 치어 오른쪽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2000년 성공회대에서 실시한 ‘이주노동자 리더십’ 프로그램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새롭게 자각케 하는 일대 계기가 됐다. 이후 샤말은 2003년부터 서울경기지역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이하 평등노조 이주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그 해 11월15일부터 ‘강제추방 저지,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계속해왔다.

최근에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 ‘라디오21’(대표 김갑수)에서 ‘이주노동자의 Voice’ 코너를 맡아 이주노동자의 처지를 알려내는 방송을 하는 등 출입국관리소의 집중적인 표적이 됐다가 급기야 2월15일 여수 출입국 관리소로 납치되다시피 끌려 왔다.

“네팔 96년부터 내전…강제추방 땐 처벌감수해야”
“도와준 사람에게 고맙다…끝까지 함께 투쟁할 것”

지난 3일 여수시 수정동에 위치한 출입국관리소 내 외국인 보호소.
기자는 서울에서 내려온 면회단에 끼어 샤말과 첫 만남을 가졌다. 철창과 유리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샤말은 단식 18일(5일 현재)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씩씩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그는 ‘여성 팬클럽’이 생겼다는 말에 수줍게 웃었다.

몸의 상태를 묻는 질문에도 “혈압이 약간 떨어지고 체중이 5.5㎏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괜찮다”며 “20일까지는 충분히 견딜 수 있다”며 오히려 너스레를 떨었다.
샤말은 단식 2 ∼3일 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동료들에게 쓴 편지에는 음식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샤말을 비롯한 네팔 농성단이 지난해부터 계속돼온 천막농성과 이번 단식농성에 임하는 각오는 특히 남다르다. 네팔이 지난 96년부터 극심한 내전에 휩싸여 있어 이들이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강제추방 될 경우 자칫 본국에서 사형까지 감수해야 할 극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네팔 농성단은 “단식을 100일도 더 할 수 있다”는 배수진을 치고 이번 싸움에 임하고 있다.

이 같은 우려는 얼마 전 방글라데시 노동자 비두 쟈말의 추방사유가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방글라데시로 강제송환 돼 투옥됐다가 가석방된 비두 쟈말이 뭄바이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에서 이를 폭로함으로써 밝혀졌다.

또 샤말은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좋은 기억도 많고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지만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더 많다”고 대답했다.
샤말은 이어 “예전에는 한국말도 못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난감했지만 한국말을 배우고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면서 많은 것을 알고 배웠다”며 “비록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행복했다”고 밝혔다.

네팔로 강제 송환되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오랫동안 전쟁을 겪고 있는 네팔에 돌아가게 되면 어려울 것”이지만 “한국에서 배웠던 것을 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해 ‘노동운동’에 나설 뜻을 내비쳤다.

이와 관련, 샤말은 한국에 오기 전 네팔에서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5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텔리이기도 했다. 94년 한국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3년만 일하고 돌아가 공부를 더 하려고 했던 것이 어느 덧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30분간의 면회시간은 친구와 동료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도 너무 짧았다. 면회가 끝나갈 즈음 그의 눈가에 짙은 그리움의 그림자가 잠시 일었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자세를 고쳐 잡은 샤말은 “도와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왔다”며 “끝까지 함께 투쟁하겠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면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턴가 진눈깨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진눈깨비는 곧이어 하얀 눈으로 뒤바뀌었지만 대지에 닿자마자 이내 녹아버렸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걸 보니 머지 않아 봄이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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