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설의 화두는 미래형 대안가족”
“내 소설의 화두는 미래형 대안가족”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3.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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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의 누이’ 펴낸 작가 송은일을 만나다
“글을 쓰는 한가지만 빛나라.”
친정 아버지가 지어준 필명인 ‘은일’에는 그런 알토란같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했다. 눈부신 햇살에 벙그레진 봄꽃들의 도발적인 유혹을 받으며 소설가 송은일(40)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들뜬 미열이 아지랑이처럼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도 잠시. 그녀가 잡은 인터뷰 장소는 꽁꽁 잠긴 채 약속 시간에 늦은 기자를 완강하게 타박하고 있는 듯했다. 간신히 전화통화를 마치고 집으로 찾아갔던 것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집안에 들어섰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거실과 베란다 안팎에 자리잡은 온갖 화초들이었다. “어느 날 예뻐서 하나 둘씩 모으다 보니 관심이 생기고 꽃집을 찾으면서 지식이 쌓였고 돌보는 시간이 늘다 보니 어느새 이력이 늘었다”고 했다. 아마 소설가로서 그녀의 인생도 소설 속의 다양한 인물의 탄생도 그와 비슷한 무늬 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때문에 다양한 특성을 가진 화초를 돌보는 작업과 소설 속의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하고 각자에 맞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소설가의 작업이 일견 닮아 보였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인물들과 지금 거실과 베란다에 자리잡은 온갖 화초들이 묘하게 맛깔 스런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소설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베스트 셀러’라는 말 때문이었다. 여중생 시절 베스트 셀러라는 말을 처음 듣고 마치 작가로서의 숙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작가라는 숙명과 다시 조우한 것은 한참 세월이 지난 후였다. 당시 그녀는 책은 좀 읽었지만 ‘문학소녀’는 아니었으며 백일장에서 상하나 받지 못해 장래희망 란에 작가라는 말을 쓰지도 못했다고 한다. 국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작가가 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과 “국문과를 나오면 모두 작가가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국문과 4년을 통틀어 시 2편을 쓴 것이 고작이란다. 그 뒤 결혼해 애를 낳고 보니 비로소 삶의 여유가 생기더라는 것. 그 때부터 “글은 배가 고파야 쓰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여유가 생겨야 가능하다”것을 지론으로 삼고 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글쓰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서른 살 무렵 광주 YMCA 문예대학이 계기가 됐다. 거기서 몇 차례 강의를 들은 것이 국문과 4년 때보다 더 많은 자극을 줬단다. 특히 그 때 들었던 ‘재능은 인내할 수 있는 힘’이라는 말은 지금도 그의 소설 쓰기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녀는 9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꿈꾸는 실낙원’이 당선돼 등단한 이후 2000년에는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아스피린 두알’이 뽑혀 전국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불꽃섬’, ‘소울메이트’, ‘도둑의 누이’ 등 장편소설을 꾸준히 써내며 어렸을 때 꿈인 ‘베스트 셀러 작갗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불꽃섬’은 동인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르는 등 작품성도 인정 받았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이 상처받은 사람들이지만 극악을 떠는 악인들은 없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일상생활을 보면 악하기만 한 사람도 착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며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일상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할 법한 이기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난히 많은 상처를 간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고나 행동으로 보면 보통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무제한의 집착을 갖고 있지만 이것을 아주 나쁜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싫단다. 그것은 TV의 드라마를 보더라도 나쁜 행동이 나오면 이내 피하고 마는 두루뭉실한 개인 성격 탓이라고.

그녀는 “소설 속 모든 캐릭터 안에는 작가가 녹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현실이 직접적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소설적으로 살지 못했던 탓’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여중생 때 ‘베스트셀러’라는 말 듣고 작가 결심
“글을 쓰는 것은 최소한의 여유가 생겨야 가능”
장편소설 ‘아스피린 두알’로 전국적 주목받아
“보편적 인간문제 다룬 것 여성소설 곡해 속상”
“영원히 안 팔리더라도 전통구조의 소설 쓸 것”

그래서 그녀는 아직까지 주변의 일화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그녀와 닮은 캐릭터가 거의 없단다. 다만 자신이 주인공의 한 부분 한 부분에서 짜깁기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녀가 가장 애착을 갖는 소설속 인물이 궁금했다. 그녀는 다소 망설이는 듯 하다가 ‘소울메이트’ 의 ‘단성’을 꼽았다.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멋지다”는 것이다.

그녀는 소설에서 여자들이 지리멸렬하게 헤매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한다. 그래서 자신의 소설 속에는 그같은 간절한 이상향을 담았다.
그녀가 소설을 통해 실현하고 싶은 이상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미래형 대안 가족제도에 대한 희망적 모색이다.

동성으로 이뤄진 가족관계(소울메이트)나 호주제 폐지(도둑의 누이) 등이 그 일환인 셈.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소설이 ‘여성문제’로 곡해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녀가 던진 소설적 화두는 ‘여성에 대한 동지애’가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그녀가 소설에서 그려내고 있는 공간은 매우 특이하다. 그녀 역시 자신이 창조한 가족 공간은 한 가정이 살기에는 꽤 넓은 곳이라고 했다. 많은 세계와 다양한 사람들을 담는 공간을 설정하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 사람살이가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공간 역시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렇게 창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그녀는 “소설을 쓰면서 어떻게 구성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서사구조를 중심으로 내용을 채워간다”고 말했다. 개연성과 관계없이 자신 안에 생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면 성과지만 그렇지 않으면 소설가로서 한계라는 것.

최근작 ‘도둑의 누이’는 근친적이고 운명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공간 안에서 눈여겨봐야 할 고통스런 여성적 삶을 통시적으로 천착하며 사랑만이 가족관계를 지탱해 가는 힘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요즘 몸살을 앓지 않을 만큼의 편안한 사랑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허우적대는 사랑이 아니라 평이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순화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300매까지 진척됐지만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속단할 수 없단다. 이와 함께 올해 안으로 단편집을 묶어 출간할 예정이며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집과 고향, 어린 시절에 얽힌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그녀는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소설에는 그다지 매력도 동화되지도 못한다”며 “영원히 안 팔리더라도 촌스런 전통구조의 소설을 쓰게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화려한 새싹보다 두어 달 묵혀놓은 씨앗에서 싹트는 것이 보기 좋다.”
대기만성형 소설가 송은일이 그의 말마 따나 촌스럽지만 전통 뚝배기에서 잔뜩 우러나온 진한 맛깔을 간직한 작품 세계로 오래 오래 기억되는 ‘스테디셀러’ 작가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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