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으로 더욱 분명해지는 것들
없음으로 더욱 분명해지는 것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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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검은꽃'. 문학동네 2003.

침몰해버린 기억

모래 위에 쓴 낙서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들, 거대한 징표처럼 역사라는 바다 위에 떠 있다가 종적도 없이 침몰해버린 것들,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기억되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대개 그런 것들은 심한 악취와 묘한 향기를 풍긴다. 사라진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내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며, 예고도 없이 증발해버릴 수도 있는 마력이 인생의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발을 들여놓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묘한 악취와 향기의 영역에 입성하는 것이다. (무릇 소설이란 그러한 것들을 작은 통통배에 의지하고서 묵묵히 저 심해에서 인양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지난 백년간 한반도의 역사는 검은 수렁들이 즐비한 지뢰밭이다. 작가가 밟은 지뢰는 1905년 제물포를 떠나 지구 반대편의 마야 유적지 밀림에서 증발해버린 일군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들과 같이 멕시코로 떠났던 1033명의 조선인들의 항로로 거슬러 간다.

근대로 가는 배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지중해를 배회했다. 오딧세우스라는 영악한 선장이 탄 그 배는 야만과 신화적인 세계를 이성의 이름으로 정복하면서 뱃길을 가르던 인류 최초의 근대로 가는 배였다. 이때 근대의 덕목은 이성이었을 것이다. 모든 역사는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그로부터 수천 년 후 극동아시아의 어느 항구에서 출발한 배가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었다. 유일한 승객은 1033명의 조선인이었다. 물론 이들은 조선 땅에서 더 이상의 희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교관도 없으며 교포도 한 명 없는 지구 반대편의 멕시코라는 땅에 노동자로 팔려가는 중이다. 수십 일을 배 밑창에 갇혀 지내면서 그들은 조선 사회의 전근대적인 흔적들을 깨끗이 지워버렸고, 새로운 근대적 주체들을 발견한다. 거대한 태평양의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젖힐 때마다 화물칸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버렸고,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조선의 황족이었던 '이종도'는 더 이상 사논공상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딸이자 애틋한 사랑의 주인공인 '이연수'는 '몸(육체)'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남자들의 시선들이 제 몸에 와 꽂힐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육체라는 작은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배에 탄 모든 조선인들은 멕시코에서 돈을 벌면 반상의 구분이 없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이 된지 백년 후에야 논의되던 근대적 징후들이 백년 전 태평양을 가로지르던 조선인들에게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하에게 멕시코로 떠난 조선인들은 민족수난사의 전형이 아니라 근대라는 끝없는 바다를 떠도는 유령들이었던 것이다.

근대의 망상들, 국가와 아버지

아버지의 부재는 곧 국가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 소설에서 주목받는 인물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다. 고아이거나 전쟁 때 죽었거나 행방이 묘연하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는 고종황제의 모습은 한 아비로서의 무기력함과 민족국가의 상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황족인 이종도를 묘사하는 작가의 필체는 그런 무기력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히 냉소적이고 희극적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팔려와 모든 사람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리고 있을 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나라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 집필을 하고 아침이면 서쪽을 향해 절을 하는 그를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조선은 문사(文士)들의 사회였다. 그들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았으며,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스레 권력을 쥐어주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전통과 반상과 남녀의 분명한 구별은 당대 아버지들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더 이상 위엄이 없었다.

국가라는 근대적인 망상에 젖은 사람은 비단 이종도만이 아니었다. 한때 조선의 군인이었으며, 멕시코의 농장에서는 조선인들의 파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조장윤도 멕시코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규합하는 조직을 꿈꾸었으며, 김이정이라는 인물은 과테말라의 혁명군을 돕기 위한 전쟁에 참가하면서 한때 마야문명이 번성했던 밀림에서 29명의 조선인으로 '신대한'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나라를 세우기에 이른다.

근대의 망상들은 마치 유령처럼 마치 악마의 마력처럼 그들의 주변을 배회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들의 국가건설이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이를 서술하는 작가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이다. 결국 그들이 세운 나라도 그들의 이상도 모두 사라진다. 흔적도 없이. 김영하의 새 소설에서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들

조선인들을 태운 배가 제물포를 떠난 지 얼마 안 돼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어 '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간다. 소수의 조선인들이 과테말라의 밀림에 세운 '신대한'이라는 나라도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소설속의 인물들이 지나왔던 모든 길들이 지워지고 사라진다. 결국 남는 것은 '그들이 살았다'라는 존재론적인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소설 전편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근대라는 개념의 징후들도 유령처럼 자취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작가가 인양한 것은 무엇인가. 때로 존재는 없음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지곤 한다. 무언가 사라진 자리를 조용히 손으로 더듬었을 때 손끝에서부터 절실하게 다가오는 허공의 무게. 그것은 표현할 수도 없고 다시 끄집어 낼 수도 없지만 너무나 분명하고 절실하게 기억의 항로로 우리를 인도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허공의 무게일 뿐이다.

*덧붙임 : 얼마전 멕시코 칸쿤에서 우리 농민 한 명이 죽음에 들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사라져간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읽으면서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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