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구도서이자 최초의 생태 환경서, '월든'
삶의 구도서이자 최초의 생태 환경서, '월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8.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서하기 좋은 9월, 꼭 권하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 10여 년 전 이래 오늘까지 내 머리맡을 떠나지 않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다.
이 책은 명문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도 출세를 내팽개친 저자가 1845년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자급자족한 생활을 기록한 글이다.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당시 나는 10여 년을 고향에서 농사일과 농민운동을 하며 시를 써오던 참이었다. 이는 삶과 시의 일치를 꿈꾼 평소의 신념대로 나름의 성심을 다한 생활이었다. 80년대 이 땅을 도도하게 휩쓸었던 민중·민주·민족이라는 거대담론의 광장에서 많은 시인·작가와 지식인들이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그런데 그런 나에게 가난은 그만두고라도 간염이라는 병고가 찾아왔다. 워낙 섬약한 체질인데다 힘에 부친 노동이 겹쳐진 때문이었다. 또한 그때는 그 찬연했던 시대정신이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혼돈을 겪더니 급기야 '잔치는 끝났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급속히 빛을 잃었다. 그 허무와 비관의 자리에 자본과 욕망, 컴퓨터와 상품, 그리고 섹스와 죽음의식이 숨진 사자 몸에 이는 구더기떼처럼 일었다.

병으로 인한 실존적 고뇌, 기대했던 세상이 좌절되자 몰려드는 사회적 고뇌 속에서 나는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그때 든 생각이, 이런 때일수록 '내공'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시인으로서 당장 세상에 불어닥친 자본과 상품에 대항하는 참인간의 길이 무엇인가, 최첨단 기술문명과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자연 친화의 소박한 생활의 길은 어떨까, 그리고 죽음과 고독을 넘어선 생명과 평화의 사상을 이제야말로 정립해야 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늘 머리를 맴돌았다.

바로 그때 우연히 서점에 들러 손에 쥔 책이『월든』이었다. 그 책은 소로우라는 한 선견지명한 지성인을 통해 내가 품었던 문제에 명경 같은 대안을 제시해놓고 있었다. 그때까지 주로 농촌생활을 했던 나도 사회·경제적 소외지대의 농촌 문제에만 매달려 잘 보지 못했던 대안이었던 바, 이는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현란한 지식도 아니고 단지 소박한 생활과 높은 사유였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책에 빠져들었다.

소로우는 모든 문명사회의 편의를 훌훌 털어 버리고 숲 속에 들어가 한 칸짜리 통나무집을 짓고, 작물을 손수 일궈 자급자족한다. 평원의 들소에게는 약간의 풀과 목을 축일 물이 생활필수품이듯 인간도 사는 데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자발적 빈곤'을 실천하며 더 기름진 음식, 더 크고 화려한 집, 더 좋은 옷을 떠나 높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청량하던가.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계절과 함께 유려하게 변하는 호수 주위의 숲과 그 속에 사는 동식물 등의 자연을 빼어나게 묘사한 부분이다. 책 아무 곳이나 들춰보아도 "강둑 위를 눈부시게 비추는 햇빛의 따스함을 느낄 때, 노란 모래 밑에 숨어 있는 검붉은 흙을 바라보고, 마른 잎이 살랑거리는 소리와 수로에서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라는 구절들이 가을날 만산의 색색의 단풍처럼 피어 있다.

그런가 하면 물질문명의 폐해, 거짓과 위선의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은 또 얼마나 통렬한가. 그는 말로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를 거부해 감옥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놀라운 것은 1850년대에 벌써 생태 파괴 문제를 깊이 자각했다는 점이다. 가령 밀렵, 대량어획, 강과 숲의 훼손, 사유지들의 확대, 대자연 속에 들어서는 공장 등에 대한 비판은 놀라우리만치 앞서 있어 시공을 초월하는 현대성을 확보하고 있다. 높이 30미터가 넘는 큰 나무 한 그루가 톱에 넘어지는 과정을 묘사하며 소로우는 거기에 깃들여 살던 새와 다람쥐, 아름다운 전설과 사람의 꿈이 한꺼번에 넘어지는 것을 아파한다. 그런데도 "왜 마을에서는 조종(弔鐘)을 울리지 않는가" 하고 그가 통탄할 때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월든』은 한마디로 삶의 구도서(求道書)이자 세계 최초의 생태 환경서이다. 19세기에 이미 21세기에 맞는 삶의 길과 생태주의적 사고를 선취해낸 혜안이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내가 삶의 실존적 고뇌와 사회적 절망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것이나, 그때까지의 삶과 생각의 틀을 뒤엎는 발상의 전환을 가능케 한 것도 이 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