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개혁, 그 성패의 열쇠
역사 속의 개혁, 그 성패의 열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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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는 단연코 <개혁>이다. 개혁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새롭게 뜯어고침" 혹은 "합법적 절차를 밟아 정치·사회상의 묵은 체제를 고쳐 새 체제로 바꿈"을 뜻한다. 즉, "무엇인가를 새롭게 바꾼다"는 것이다. 물론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꾼다"는 의미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개혁을 크게 외치는 사회나 시대일수록 좋지 않은 면이 많다는 증거라 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 또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개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헌에 나타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적 조치는 신라 제5대 왕인 파사이사금 11년(A.D 90년) 7월에 취해졌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왕이 사신 10인을 각 주·군에 파견하여, 공사에 부지런하지 않아 전야를 많이 황무케 한 관리를 감찰하여 그들을 폄출케 함으로써 천재를 조심하게 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당시 농토를 묵히는 것은 천재를 불러일으키고 백성을 고통에 빠뜨리는, 즉 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중대한 범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초래한 관리를 내쫓는 조치야말로 당시의 주요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 정치였음에 틀림없다.

이후에도 우리 역사에서 부정 부패와 이에 대한 개혁 조치는 마치 숨바꼭질 놀이처럼 반복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건국은 고대사회의 모순이 어떻게 집약되었으며 어떻게 타파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즉, 골품제의 모순 속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던 경주의 귀족세력에 대한 개혁은 골품제의 붕괴로 진행되었으며, 종국에는 신라사회의 종말과 고려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부정부패와 개혁의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도 "뇌물로 받은 고기 수만 근이 창고에서 썩어 갈" 정도로 부패한 이자겸과 같은 문벌귀족세력, "새가 날아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 해와 달을 가리울 만큼 큰 누각을 지어 호사를 부린" 최충헌과 같은 무인집권자,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로 광대한 농장을 소유한" 염흥방과 같은 권문세족으로 대물림한 지배층의 부패는 계속되어졌다. 이에 고려 사회의 자생적 정화 능력은 부정되었으며, 결국 이성계와 조준 그리고 정도전 등에 의하여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그러나 "국왕의 왕도정치, 신하의 충실한 간쟁과 보필, 백성의 부지런한 농상"으로 구현되어야 할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이상국가론은 우리 역사상 백성들이 가장 열악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삼정의 문란>으로 종결되었고, 마침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도대체 고대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건국된 고려와 권문세족의 부패를 혁파하고 세워진 조선의 꿈은 왜 실패로 끝나게 되었을까? 물론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다만 조선 왕조의 진정한 조선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친 정조의 개혁정치가 주는 교훈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776년 즉위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2년 뒤에 정치개혁의 총론이 담긴 교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시비의 논쟁'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시비 논쟁이란 원래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인데, 당쟁이 극심해지자 상대편을 죽이는 데로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한쪽의 정치세력은 실권을 장악하고 반대편은 죽게 되는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사람들을 좋아했을 리 없었겠지만, 이를 당시의 정치 이슈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즉, "정치원칙인 의리는 의리로, 부모에 대한 애통은 애통으로" 구분한 것이다.

둘째, 관직배분에서 균형성을 강조했다. 이는 문벌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것과 지역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것으로 구분된다. 당시 문벌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좋은 문벌이 아닌 사람도 함께 써서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본거지가 주로 경상도 출신으로서 문벌 대열에서 도태된 남인세력과 함경도·평안도 지역사람들도 등용하여 지역 간의 균형을 지키고자 시도했다. 즉, 인적 자원의 배치와 활용에 있어서 전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추구한 셈이다.

셋째, 정치원칙을 절충하여 재창조하자고 강조했다. 정조는 소모적인 '시비 논쟁'은 없애되 정치원칙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젊은 인재를 끌어 모아 개혁을 앞장서 추구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이전의 정치원칙을 종합해서 그보다 높은 수준의 정치원칙을 만들어 나아가고자 하였다.

넷째, 군주권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왕권강화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군대의 장악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에 5군영의 힘을 약화시키고 새로이 장용영을 설치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집중시켜 나갔다. 또한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력을 강화하여, 조세도 제대로 거둬들이고 백성도 완전하게 파악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이상국가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절대권력자로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되고자 하였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려면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화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 시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군주로서 존경받은 임금은 세종과 정조뿐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서 정조의 개혁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겠다. 다만 정조가 추구한 개혁의 큰 틀이 2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에 놀라울 뿐이다. 개혁의 성공을 위해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특히 개인과 집단의 이익과 행복이 <우리>라는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찌 한 사람의 영웅만으로 이처럼 어렵고 복잡한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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