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큰 장사꾼' 정주영씨의 죽음
'통큰 장사꾼' 정주영씨의 죽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3.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떼 방북 '통일'에 기여, 위기의 현대 남기고... 위기의 현대를 남기고 창업자 정주영 전 회장이 숨졌다. 한국형 기업가의 표본으로 불리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3월 21일 밤 10시 서울중앙병원에서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6세.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은 22일 오전 11시 연구소 2층 VIP룸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25일까지 조문객들을 맞고있다. 빈소 연락처는 062-370-4039.>-- 중앙병원 대변인 피영수 교수는 밤 11시 10분경 "오후 10시에 3층 중환자실에서 사망했고 병명은 폐렴에 의한 합병증의 일종인 호흡부전증"이라고 밝혔다. 피 대변인은 "오후 3시경부터 호흡부전증이 악화돼 의식은 있었지만 기관지에 호흡기를 삽입해 말을 못한 상태였다"면서 "1주일전부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고 전했다. 정 전 회장은 작년 5월 아들 몽구, 몽헌과 함께 3부자 퇴진을 발표한 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가회동 집과 서울중앙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으며 작년 8월부터 서울중앙병원 18층에 머물러 왔다. 한편 현대 국내외 작업장에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조의를 표명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될 예정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시신은 방부처리된 상태로 앰뷸런스를 이용해 22일 오전 6시 청운동 자택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빈소는 청운동 자택에 마련될 예정이며, 22일 오전 8시부터 조문객을 맞는다. 장례식은 5일 가족장으로 치러지고, 장주는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이다. 장지는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가족묘지이다. 정주영씨의 파란만장한 생애 1915년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맞닿아 있다.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 회장의 삶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드리워졌던 가난을 벗어 던지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됐다. 집에서 소판 돈을 훔쳐 서울로 도망쳐온 청년은 자전거 사업에서 시작해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가난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발버둥 쳤던 정 회장의 생은 한국전쟁 이후 시작된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정 회장이 결정적으로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베트남 전쟁과 중동건설 특수다. 60년대 중반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가 따낸 베트남 해외공사를 기반으로 현대는 국내 건설업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정주영식 건설의 특징은 발주자가 원하는 공사비 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공사를 진행하는 획기적인 공사방안. 공사수주에 극대화를 가져와 소양강댐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굵직한 사업을 성공시켰다. 정 회장은 건설로 쌓은 명성을 이번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건설과 조선을 축으로 현대는 중동특수와 함께 한국 최대 재벌로 성장해 갔다.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는 70년대 세계 최대의 공사로 페르시아만 주베일 지역 모래펄에 대규모 산업항을 만드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건설업으로 급성장한 정회장은 자신의 고향의 이름을 따 아산재단을 설립, 현대건설 1천억원의 50%인 5백억을 투입하기에 이른다. 정회장의 활약은 80년대 이후 외부활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81년에는 올림픽 유치위원장으로 IOC위원들에게 손수 만든 꽃바구니를 선물해 올림픽을 유치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89년에는 소련 방문에 이어 북쪽의 당서열 4위인 허담을 만나 북개방을 위한 선구자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폈다. "아파트 반값, 2층고속도로 건설"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가지고 1992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된 정주영 회장은 3등으로 고배를 마시게 된다. 그는 1980년대에 경제인으로 겪었던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곤 했다. 정주영 회장의 진가를 발휘한 것은 98년 6월 16일 소떼몰이로 방북을 시도했던 일. 1989년 민간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지 9년만에 소떼 500여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정회장의 소떼 방북은 98년 11월 18일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정회장의 대상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확인시켜 줬다. "정주영이야말로 통큰 장사꾼"이라는 감탄이 사람들 입에서 절로 터져 나왔다. 그는 98년 10월 민간 기업인으로서 최초로 북한의 최고지도인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켰으며 꼭 1년 후인 99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다시 만나 서해안 공단 사업 등 다양한 남북 경협 사업을 구체적으로 다져갔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을 시발로 해서 남북의 공동 경협이 본격화 됐다는 점만으로서 정주영 회장의 공로는 인정하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이후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왕회장의 영향력은 그룹 현대내에서 서서히 배제되기 시작했다. 2000년 3월 14일 시작된 '왕자의 난'은 이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대장동차의 몽구(MK)와 (주)현대아산의 몽헌(MH)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는 건강이 위급한 상태인 정주영 회장의 '싸인'공방으로 희화화 됐고 8개월 만인 11월 위기에 몰린 동생 몽헌이 형 몽구를 만나 구원을 요청하면서 일단락 됐다. 그러나 시장의 원리를 무시하고 계속 밑빠진 독에 물붓듯이 현대건설에 투입되는 공적자금과 결국 금강산 사업에 대해 정부에 손을 벌리게된 현대아산 등 왕회장이 남기고간 현대의 오늘은 극도의 위기감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마이뉴스(ohmynews.co.kr) 제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