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풍경이 아름다운 것은…(고덕산)
겨울풍경이 아름다운 것은…(고덕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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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산(605m.전북 임실)

논밭에는 채 녹지 않은 눈들이 하얗게 덮여 있고, 개울에는 살얼음이 사르르 얼어 있다.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부딪치자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오싹하게 한다.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여행은 매력이 있다. 텅 비어 있는 들판, 메말라버린 야생초, 잎을 떨구어버린 나무들. 이러한 겨울 풍경은 포만감에서 오는 나른함이 아니라 공복에 느끼는 즐거움 같은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임실군 관촌면 운수리 고덕마을로 통하는 시멘트 길을 걸으며 이런 생각에 잠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덕마을은 5∼6가구에 불과한 작은 산골마을이다. 지붕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고드름의 모습이 한겨울 산골마을 풍경답다. 고요한 마을에 낱선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한다. 개 짖는 소리가 양쪽 산을 울리면서 마을의 정적이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이방인이 끼어 들어 마을의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

고덕마을은 동서로 이어지는 고덕산 끝자락에 기대고 있다. 고덕마을 뒤에 자리잡은 산이라 하여 산 이름도 고덕산이다. 고덕마을은 고덕산에 의지하고, 고덕산은 고덕마을의 이름을 빌린 셈이다. 마을입구에서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1봉이 바라보인다. 마을 골목을 지나 산으로 올라서자 울창한 소나무 조림지가 일행을 맞이한다. 소나무 아래에는 키 작은 진달래나무가 빽빽하다.

바위에서 생명력 과시하는 노송


솔숲이 점차 활엽수림으로 바뀌면서 암릉이 시작된다. 로프를 잡고 1봉으로 올라선다. 사방으로 터지는 전망이 시원하다. 서쪽과 남쪽으로 임실군의 올망졸망한 야산과 넓지 않은 들판이 넘실댄다. 나무 위를 제외하고는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어 순결해 보인다.

1봉을 기점으로 아기자기한 바위 봉우리가 계속 이어진다. 매끄럽다기보다는 거친 듯한 표면과 무뚝뚝한 모양의 남성다운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바위에서는 어김없이 분재 같은 소나무들이 고통을 감내하며 멋진 예술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노송뿐만 아니라 굴참나무 같은 활엽수도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생명이란 이토록 고귀한 것이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바위에서도 의젓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봉우리 하나를 넘을 때마다 로프에 의존하는데, 눈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암봉들은 오밀조밀하여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는데도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능선 양쪽으로는 산자락에 좁게 형성된 논배미들이 올망졸망하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변은 첩첩산중이다.

3봉을 지나자 좁은 문이 등장한다. 폭이라고 해보아야 겨우 30cm나 될까말까한 바위굴을 배낭을 벗고서 옆으로 겨우 통과한다. 이런 모양새 때문에 산부인과바위로 불린다. 4봉에 올라서자 3m 정도 높이로 날렵하게 생긴 입석(立石)이 있다. 방금 전에 만난 산부인과 바위와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자연은 이토록 신비롭다.

4봉을 지나자 잠시 평평한 흙 길이 이어진다. 길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여전히 미끄럽다. 5봉과 6봉을 지나 7봉에 올라서자 8봉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직선거리로는 불과 50m도 안될 것 같다. 7봉의 시원한 전망이 일품이다.
7봉에서 8봉 사이 안부로 내려가는 로프가 험하다. 더군다나 바위에 눈이 쌓여 있어 내려가는 길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안전시설이 충분치 않은 산이라 고덕산은 눈이 쌓여 있는 겨울에는 피하는 게 좋을 듯하다.

정상에서 지금까지 지나온 암봉을 바라보니 장관이다. 북동쪽으로는 두 개의 봉우리가 지금까지의 암봉보다는 간격을 두고 아기자기하게 솟아 있다. 1봉부터 8봉까지의 바위 봉우리들이 남성다운 기세였다면 9봉과 10봉은 올망졸망한 바위들로 하여금 여성적인 분위기다.

고덕산 자체의 멋도 멋이지만 주변의 산들이 인상적이다. 동쪽으로 성수산(876m)과 팔공산(1,151m)이 중후하고, 북동쪽으로 선각산·덕태산 같은 금남호남정맥상에 솟은 고봉들이 하얀 고깔을 쓰고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그리고 진안군 백운면에서 임실군 관촌면으로 이어지는 742번 지방도로 너머로 내동산(887m)이 이웃하고 있다.

"옛날에는 호랑이도 살았어요"


북쪽과 동쪽에 높은 산들이 자리잡고 있다면 남쪽과 서쪽에는 고도가 높지 않은 산들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순창의 회문산(830m), 임실의 오봉산(513m), 경각산(659m)과 수많은 야산들이 그것이다. 임실읍내와 멀리 오수면소재지도 바라보인다. 고덕산은 비록 600m를 갓 넘긴 낮은 산이지만 첩첩산중에 자리잡아 깊은 맛이 있다. 눈 덮인 마을에서는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정답다.

양지바른 곳을 지날 때면 나목 상태의 굴참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이 엄마 품처럼 포근하다. 9봉에서 본 8봉은 칼날같이 날렵하게 솟아올라 시원스러운 모습이다. 울창한 숲이 이어지다가도 암릉이 나타나곤 하는 변화가 계속된다. 눈이 푹푹 빠지는 고요하고 소박한 길을 걷다보니 더 없이 행복하다.

이런 산 속의 눈길을 걸을 때면 중학교 때 토끼몰이를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눈이 와서 산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날이면 우리들은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 근처의 산으로 토끼몰이를 가곤 했다. 말이 토끼몰이지 토끼를 잡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꼭 토끼를 잡겠다는 것보다는 눈이 쌓인 산을 오르면서 아름다운 설경을 즐기라는 선생님들의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열 아홉 살 때는 저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부터 몇 년 전인데요?"
"40년 전이지요. 지금이야 도로도 뚫리고 그랬지만 옛날에는 말도 못하게 산골이었거든요."
하산지점인 염북마을에서 동네 아저씨와 이런 얘기를 나눈다. 호랑이가 살 정도로 산골이었다는 얘기다. 자연생태계가 자꾸만 파괴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아저씨의 옛 이야기는 차라리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대화를 나누면서 바위봉우리로 이어지는 고덕산 줄기를 바라본다. 불쑥불쑥 솟은 바위봉우리들이 율동적이다. 하지만 저 산을 바라보며 평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아저씨의 눈동자가 그리 밝지를 못하는 것은 왜일까? 불어오는 바람이 내 몸을 싸늘하게 한다.(2002. 12. 29)

*산행코스
-. 제1코스 : 고덕마을 입구(1시간) → 4봉(20분) → 정상(1시간) → 능선갈림길(20분) → 염북마을 (총 소요시간 : 2시간 40분)
-. 제2코스 : 고덕마을 입구(1시간) → 4봉(20분) → 정상(1시간 20분) → (덕봉사 경유) → 고덕마을 입구 (총 소요시간 : 2시간 40분)
*교통
-. 전주와 남원간 17번 국도가 지나는 관촌에서 742번 지방도로를 타고 백운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덕봉사 표지판이 보인다.
-. 임실이나 관촌에서 백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이용하여 덕봉사 입구에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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