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의 거리
허위의 거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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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골, [네프스끼 거리], [뻬쩨르부르그 이야기](2002), 민음사

고골.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를 두고 말하길,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말한 바 있는 작가. 그런 그가 남긴 단편 다섯 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잘 알려져 있는 '코', '외투'는 물론, '초상화', '광인 일기', '네프스끼 거리' 등이 실려있다. 지금까지 나온 책들 중 가장 많은 편의 소설들이 담겨져 있는 셈이다. (범우사에서 출판된 책에는 '코', '외투', '초상화', 세 편만이 실려있다.)



이 다섯 편의 단편들 중, 새로 읽게 된 단편, '네프스끼 거리'는 단연 압권이었다. 한 이상주의자 화가와 세속적 속물인 장교가 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번화가인 네프스끼 거리에서 각기 여성을 만나고 쫓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단편은 허위로 가득 찬 근대 도시와 그 도시를 살아가는 근대인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샬 버만Marshall Berman은 '현대성의 경험'의 제 4장, '페테스부르그: 저개발의 모더니즘'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현대성을 논의하기 전에 고골의 이 작품, '네프스끼 거리'를 중요하게 다룬다.



화가 삐스까료프는 거리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검은 머리의 여인을 보고 그녀의 뒤를 쫓는다. 그는 그녀가 대단한 여인이라고 상상하지만, 사실 그녀는 창녀인데다가, 성격도 천박하기 짝이 없는 여인일 뿐이다. 이 사실을 알고 그는 심각한 정신 장애를 일으키고 만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잠들어서 여인의 꿈만 꾸는 것이며, 쉽게 잠들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기까지 한다. 그의 꿈 속에서 여인은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는 이제 상상의 나래를 펴서 여인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런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사랑과 예술에 의지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찾아간 그를 여인은 비웃는다. 그 충격으로 예술가는 자살하고 만다.



장교 삐고로프 중위는 거리에서 금발의 여인을 만나 그녀의 뒤를 쫓는다. 이 여인은 독일인 기능공 실러의 아내임이 밝혀진다. 삐고로프 중위는 실러에게 일을 주문하고 실러 부인과 밀회를 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이런 일을 수월히 할 수 있는 것은 장교라는 자신의 지위,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러시아인의 특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러시아 사회는 인간의 가치를 지위에 의해서 평가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유명한 단편 '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단편에서, 자신의 코를 잃어버린 한 8등관 장교는 자신의 코가 5등관 장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 때의 장교의 모습, 자신의 코한테 굽신대는 모습을 보라.)



고골
그러나 밀회의 장면을 목격한 실러와 그의 친구들은 대담하게도 중위에게 '비열한 놈'이라 욕을 하고, 팔다리를 붙잡아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그 다음 순간의 장교의 반응이 재밌다. 그는 일단 격노하여 장군에게 찾아가 이 사건에 대해 말할까, 아니면 고소장을 제출하여 독일 놈들을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 버릴까 하는 등의 생각을 하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들른 과자점에서 먹은 삐로그(파이의 일종)를 먹고, 상쾌하고 시원한 저녁의 날씨 속에서 길을 거닐고, 저녁 파티에 가서 숙녀들 앞에서 멋지게 마주르카를 추는 통에 자신이 당한 굴욕을 어느 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화가와 장교가 각각 겪은 일화가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을 어려운 말을 섞어 지루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줄로 안다. 다만 이들의 서로 다른 듯한 모습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양면적 가치의 일단들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없이 속물적이면서도 때로는 한없이 진지하고 순수한 우리들. 서로 대립하는 이 양 축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만약 균형이 무너진다면, 삐스까료프처럼 광기어린 죽음으로 치닫게 되거나, 삐고로프 중위처럼 비열한 속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작가 고골은 미쳐서 죽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네프스끼 거리'의 마지막 부분 묘사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네프스끼 거리라는 건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무엇보다도 밤이 거리의 구석구석까지 들어차고 짙어지면서 하얗거나 크림색으로 빛나는 집 벽들이 드러나게 될 때, 도시 전체에 굉음과 번쩍이는 불빛이 넘쳐흐른다. 무수한 마차가 다리 쪽에서 몰려오고 마부가 고함을 치며 말 위에서 뛰어내릴 때, 그리고 악마가 모든 것들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램프의 불을 직접 켤 때, 네프스끼 거리는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속인다."(282면)

네프스끼 거리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현대의 도시라면 그 어느 곳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묘사인 바(그 수많은 상품광고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추구하는 욕망이 실은 기만과 허위에 가득 차 있는 것임을 이 작품은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 뻬쩨르부르그와 페테스부르그는 같은 도시를 가리킨다. 발음을 통일해야 했지만, 각각의 책에서 다른 발음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책의 표기를 준수하고자 그대로 썼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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