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꿈-영산강 일대 고분군과 고인돌
제국의 꿈-영산강 일대 고분군과 고인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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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이대흠의 내가 사랑하는 세상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빼앗긴 것은 주권만이 아니었다. 몇 천년의 역사에 비하면 짧다고 할 수밖에 없는 36년을 통해 우리는 유구한 우리 역사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다. 일제에 의해 무수히 반출되고 도굴된 유물들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은 물건만이 아니라 역사였다.

그 중 하나가 나주의 반남리 고분군과 관련된 것이다. ‘반남 고분군을 최초로 조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다. 1917~18년 곡정제일(谷井濟一)■소장항길(小場恒吉)■소천경길(小川敬吉)■야수건(野守健) 등 4명의 위원이 나주군 반남면 신촌■덕산■대안리 일대 고분들 가운데 신촌리 9호분, 덕산리 1호■4호분과 대안리 8호■9호분 등을 발굴■조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대적인 발굴 조사와 달리 곡정제일이 단 한 쪽 짜리 보고서만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발표를 갈음했다.’(이덕일, 이희근 공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김영사)

그 조사에서는 금동관과 금동 신발, 여러 종류의 옥(玉)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장의 보고서를 통해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형태로 보아 왜인의 것일 것이다.’는 말만 남겼다. 그리고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특별히 제출하겠다고 해 놓고는 20년 동안 어떤 보고서도 제출되지 않았다.

이들의 한 장 짜리 보고서가 발표되자, 흥분한 것은 역사학자들이 아니라 도굴꾼들이었다. 아무런 보호조치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도굴꾼들은 반남 일대의 고분을 마음대로 파헤쳤다. 그리고 최초의 보고서가 나온 후 20여년이 지나서는 고분의 상태는 원래의 모양을 거의 잃어버릴 정도로 파괴되었다.

왜 그랬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참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면서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하였던 일제가 왜인들의 유적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던 반남리 고분군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도굴을 조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일본의 고대왕국과 반남리 고분군 세력과의 관련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반남리 고분군은 일본의 고분군과 유사한 형식인데, 일본열도에 있는 고분들 보다 조성된 시기가 빠르다는 점을 일인 학자들은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최근에 역사스페셜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다루었던 것 중 하나가 ‘왜(倭)는 한반도 남서부에 있었다.’ 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로 생략하기로 하자. 하지만 삼국사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빈번히 등장하는 ’왜(倭)‘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본열도에 있어야 할 ’왜(倭)‘가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것으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왜(倭)‘를 ’왜이(倭夷)‘로 기록해 둔 사서도 있다.)

©이대흠

이전까지 우리의 정통사학 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그 기록을 오기로 보았다. 하지만 ’왜(倭)‘가 한반도 서남단에 있었다는 설은 상당히 근거가 있어 보인다. 최소한 ’왜(倭)‘라는 나라가 아니더라도 그만한 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고분들에 대한 해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은 고구려 신라 백제와 대등한 세력이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록으로 보면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5세기 무렵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열도 내에 영산강 유역의 고분과 유사한 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왜(倭)라는 글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단서이다. 한자를 풀어보면 왜(倭)라는 글자는 머리에 볏단을 이고 있는 여자이다. 그러므로 ‘왜(倭)’는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에 있어야 옳다. 청동기 시대에 벼농사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 어디인가? 동북아를 놓고 보면 중국의 하남과 한반도의 서남단 쪽이 벼농사가 발달한 곳이다. 또 하나 한자어가 아닌 ‘왜’라는 말은 ‘우리’라는 말과 같다고 한다. 무언가 잡히지 않는가? 청동기 시대에 재배된 볍씨의 종자도 일본열도의 것과 영산강 유역의 것이 같다.

벼농사는 청동기 문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동기로 인해서 벼의 재배가 가능했던 것이다. 청동기 시대를 생각하면 또 한 빼 놓을 수 없는 유물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 약 7만여 개가 분포되어 있다.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과 인도 인도네시아 대만 오끼나와 중국 황해 연안 등 바다와 인접한 곳에 주로 분포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전 세계의 절반이 넘는 약 4만여 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북한에 있는 1만여 기를 빼고 나머지 3만여 기는 대부분 전라남북도의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영산강 유역에서 19000여기 정도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화순 고창을 비롯한 몇 군데의 고인돌군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

나는 그 기사를 접하고 코웃음을 쳤다. 고인돌이 어떤 문화인데, 몇 개의 군에 있는 것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된다는 말인가? 고인돌(지석묘)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려면 최소한 전라남북도 전체와 강화군 정도가 포함되어야 한다. 화순과 고창의 고인돌만 중요한 유산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은 가치가 있는 탐진댐 인근의 고인돌군은 지자체가 다! 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유산은 특정 지자체의 이익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다. 정부의 근시안적인 태도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문자가 없던 시대 역사서는 유물이었다
그 역사가 파괴되고 버려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벼농사 재배지였고, 가장 위대한 고인돌 문명이 있는 곳을 함부로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도 여전히 세계 문화 유산이라고 해야 할 여타 지역의 고인돌 군은 파괴되고 버려지고 있다. 필요한 것은 특정 지역의 문화 유산이 아니다. 행정 구역이라는 것은 지금의 편의에 의한 구분일 뿐이지, 문화의 권역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청동기 시대의 위대한 문명이라고 해야할 고인돌군(지석묘군)을 우리는 도외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전체를 보지 않았다면 이집트 문명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서울 서울을 중심으로 한 권역이 한국의 대표 지명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5000년 전에는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벼 문화의 발상지였음을 상기하자.

하지만 우리는 실로 많은 역사 자료를 잃어버렸다. 갖은 외침에 시달린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특히 고대사 부분은 상상이 아니고는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것이 고대사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세계 최고의 청동기 문명을 자랑하였을 영산강 일대의 세력이 몰락한 것은 북방에서 출연한 철기문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동기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잡았을 그들은 몇 백년을 버티다가 마침내는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여전히 물음표로 남는 고인돌군. 우리의 위대함은 고인돌 문명을 잃어버린 순간부터 상실된 것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영산강 유역의 신촌리 고분에서는 금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3세기 후반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형식의 ‘옹관고분’부터 백제의 영향으로 보이는 ‘석실분’까지 오랜 기간의 묘제가 한곳에서 출토된 곳은 ‘복암리 고분군’이다. 몇 세기에 걸쳐 왕국에 버금가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료를 잃어버린 것도 억울한 일인데, 우리는 지금 많은 역사자료들을 방기하고 부수고 있다. 도로 건설을 위해 고인돌의 굄돌과 받침돌을 콘크리트로 묻어버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이유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이 안되었다는 것뿐이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의 역사서는 유물이다. 우리는 5천년 혹은 1만 년 전의 사서를 찢고 깨부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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