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라한 가을을 위한 변명
나의 초라한 가을을 위한 변명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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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마동욱

비가 그치더니 바람이 불어 구름은 정처없이 서성거리고 들판에는 온갖 곡식을 갈무리하는 아재아짐들의 굽은 등이 언뜻언뜻 보입니다.옥수수,가지,벼,감자,고구마,고추,배추,무,호박,토란,파,콩,참깨,들깨...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 많은 작물들을 키우고 거두는 들녘의 가을볕과 아재아짐들에게 즐거운 노래라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의 가을은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땅을 파고 씨뿌리는 봄날에 도대체 무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자연은 어김없어 봄에 땀 흘려 일하지 않았더니 가을에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벼농사를 지을 마땅한 묵은 논이 없는 것도 아닌데 올 해도 내 손으로 수확한 쌀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비료는 왜 안하냐,농약은 왜 안치냐,요란스러울 아짐들의 간섭이 귀찮고 성가시어 그랬을까요.

입은 뚫려있어 핑계를 대자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올 해 농사는 짓지 말고 집을 짓자 계획한게 사실입니다.솔직히 두 가지 일을 다할 자신이 없었습니다.벗들과 수몰마을에서 물에 잠길 집을 뜯어다 놓고 집지을 터에 주추도 박아 놓았습니다.그런데 그게 목수와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허사가 되었습니다.그 다음에는 <수몰마을문화제>라는 지역행사를 덜컥 기획하여 여러 벗들과 두 달여를 매달리게 되었습니다.이 정도면 변명의 알리바이가 완벽한 셈인가요.

©마동욱

우리집 텃밭은 또 어떠한가.봄에 고추며 오이며 고구마며 호박이며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었습니다.풀은 두어 번 낫으로 베어 주었습니다.하지만 지역문화행사를 준비하느라 장마철에 바깥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텃밭은 엉망으로 풀밭이 되어버렸습니다.겨우 호박 서너 통,풋고추 조금 따먹었을까.

얼마전 한치를 다녀간 광주의 벗이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얘기하길 저의 주 수입원이 한봉이랍니다.그런데 이제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할것 같습니다.집 주위로 열 통 남짓 벌통이 서있는데 어느 순간 모두가 벌이 없는 빈 집이 되었습니다.밀원이 풍부했던 예전에는 첫 눈이 내릴때 쯤 밀랍을 잘라 꿀을 받았는데 가을 밀원이 빈약한 지금 한치에선 장마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밀랍을 자릅니다.

©마동욱
그리고 벌밥(설탕물)을 주는데 어찌되나 벌밥을 주지않고 그냥 두었더니 이 친구들이 모두 나가버린것입니다.야생의 세계로 자유를 찾아 나간 것일까요.이렇듯 나의 시골생활은 생태적 관념과 야생의 자유 사이에서 어떤 만남의 공간을 창조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내 시골생활의 최후의 보루인 자식농사는 잘 짓고 있는가.대도시에서 산골오지로 내려와 한 학년이 겨우 일곱 명인 시골중학교에 다니니 이른바 학력이란 잣대로 자식농사를 바라볼 마음은 애시당초 없습니다.함께 책 읽고 땀 흘려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지의 소중한 이치를 몸으로 체득하고 서로 나눔의 정신을 배우는 사려 깊은 아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아들은 애비를 신뢰하지 않는 눈치입니다.이 모두를 보건대 시골생활의 기본을 무엇보다 자신이 먹을 것을 자기 손으로 해결하는 자립의 정신에 두고있는 저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밤에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않는 우리 마을 병태 성님이 술 한 잔 먹자고 뜬금없이 전화를 했습니다.성님이 산에서 캐온 더덕무침에 소주 한 잔 마시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마을의 미래에서 우리 삶의 불안까지 많은 생각을 서로에게 열어 놨습니다.그리고 내 년에는 함께 농사를 짓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바깥의 모든 일에 앞서 지금 여기 이 마을에서 농사 짓는 일이 중요하리란 생각에서 말입니다.

이러쿵 저러쿵 시시콜콜한 고백을 한 꼴이 되었습니다.눈 밝은 벗이라면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이제 한치의 생활을 먼저 다잡을 생각입니다.한치의 생활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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