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지겨운 여유'
김용택의 '지겨운 여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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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성 기자

1997년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에서 {蟾津江流域史硏究}라는 거대한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의 제1장 총설을 보면 섬진강유역의 역사문화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첫째, 섬진강 유역은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세계와의 왕래가 크지 않아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둘째, 섬진강 유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동서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세력의 영토 쟁탈의 대상이 됨으로써 수많은 전란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동서의 대립보다는 교량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셋째, 섬진강 유역은 역대 중앙권력의 주변지역이었기 때문에 지배층의 문화가 미친 영향이 적다. 그리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양반문화의 흔적이 적으며 도시의 발달이 더딘 반면 토착세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다. 따라서 섬진강 유역의 경우에는 피지배층 문화의 잔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넷째, 섬진강 유역은 근대 산업화과정에서도 소외되어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농업에 대한 의존이 크며, 자본주의의 상업화에 예속되어 있는 실정이다.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혹시 이 책을 직접 본 사람은 여실히 느낄 수 있겠지만, 거의 800 쪽에 달하는 그야말로 섬진강을 모두 담고도 남을 만한 볼륨을 자랑한다. 그래서 섬진강과 관련된 역사적 지식을 얻는 데에 이 책이 크게 도움될 것으로 믿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설에 제시된 네 가지의 특징을 통해서는, 섬진강만의 그 무엇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더라도 섬진강 유역에 관한 학술적 접근이 필요한 사람은, 가장 최근에 발간된 종합보고서인 이 책을 참고하길 바란다.

나는 섬진강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蟾津江流域史硏究}에 맡기고, 오히려 문학적으로 가까이 가보려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문사철(文史哲)'을 통한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 까닭이며, 강이라는게 원래 역사보다는 문학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섬진강에 대한 문학적 접근은 소설이나 수필보다는 시가 중심이 될 것이며, 그 중에서도 저물어 가는 섬진강을 노래한 시를 그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래서 '저문 강', '저문 섬진강'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을 적어 보았다.


1. 이중환의 섬진강에 대한 지적소유권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擇里地}의 복거총론(卜居總論) 편에서 살만 한 곳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대저 살터를 잡는 데는, 첫째는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셋째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넷째 산수(山水)가 좋아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는 비록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곳이 못되고, 생리는 비록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함께 좋으나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나들이 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마음을 밝게 가꿀 수 없다".

고 하였다. {擇里志}라는 책은, 이중환이 "사대부가 진정 살만 한 곳은 어디인가?"라는 화두를 내걸고 30여 년 동안 팔도를 방랑한 끝에 저술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이다.
이중환은 섬진강을 돌아보고 나서, "별은 드물고 달 밝은 밤에 강 위의 작은 배는 사람이 없어도 양쪽 기슭을 왔다갔다한다"고 노래하였다. 그리고 섬진강을 끼고 있는 구례의 구만(九灣)에 대해서,

구만은 잔잔한 물이 굽이쳐 돌고 강 너머에는 오봉산(五峰山)이 남쪽에서 만난다. 두 도 사이에 끼어서 물자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 넓은 들이 모두 비옥하다. 별이 드물고 달 밝은 밤이면 강 위의 작은 배가 홀로 양쪽 기슭을 오간다. 세상이 전하는 말로는, "오봉산에 있는 선인이 지리산을 왕래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중략) 이곳은 동쪽에 지리산이 자리잡고 있어, 평시나 난세나 언제라도 살 만한 곳이다({擇里地}, 卜居總論, 山水).

라고 평가하였다. 즉, 구만은 평시나 난세나 언제라도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3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닌 이중환이 틀린 말을 했을 리 없으니, 구례지역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었나 보다.

©김태성 기자

2. 섬진강, 왜 '저문 섬진강'인가?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의 작가 곽재구는, 대학 시절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도보 여행을 하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이불자락인 섬진강의 모래를 등에 지고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은 그대로 램프의 꽃밭이었다. (중략) 램프의 도움 없이 책을 읽고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섬진강변에서 꼬박 하룻밤을 눈뜨고 새운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자연의 특급비밀이다"고 찬미하였다. 요즈음 젊은이들 중에는, "콘도에서 잘 것이지, 모기 물려 가면서 웬 청승이냐"고 웃어넘길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곽재구 시인이 대학을 다녔던 70년대 중반에는 그것이 낭만이고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섬진강을 노래한 시나 수필은 아주 많은 편인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한결같이 '저문 강'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유홍준은, "섬진강의 해질녘 노을이 보랏빛으로 정말 아름답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에서 <저문 섬진강에 부치는 노래>라는 글에서,

섬진강은 특히나 해질녘 노을 물들 때가 정말 아름답다. 한낮의 섬진강은 진초록 쑥빛을 띠지만 석양을 받아 반사하는 저물녘의 섬진강은 보랏빛으로 변한다. 그 풍광의 경이로움을 보통내기들은 절대로 묘사해내질 못한다. 그래서인지 섬진강을 읊은 시인들은 한결같이 저문 섬진강을 노래했다(45 쪽).

라면서, 시인들이 한결같이 '저문 섬진강'을 노래한 까닭을 '아름다운 보랏빛'을 들어 나름대로 설명하였다.
'저문 섬진강'을 노래한 시인으로 고은 선생 또한 빠트릴 수 없다. 그는 <蟾津江>이라는 시에서,

뼈저리거든 저문 섬진강을 보아라.
내가 은연중 불러도 가까운 산들은 밝은 귀로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에 진하게 떠오르지만
또한 老姑壇 마루가 꽃처럼 떠오르기도 하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진간장으로 흐르는구나.
뼈저리게 서럽거든 저문 강을 보아라.
나는 그냥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큰 일과
그보다는 강물 가장자리 서러운 은어떼 헤매는 일과
華嚴寺 覺皇殿 한 채를 싣고 흐르는 일들을 볼 따름이구나.
저문 강물을 보아라. 한동안을 즈믄 동안으로 보아라


라며, '저문 섬진강'을 진간장처럼 진하게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고은 시인은 '뼈저리거든 뼈저리게 서럽거든, 섬진강을 저문 섬진강을, 아주 오랫동안 보라'하였다. 일견 비장하기도 한 이 시의 느낌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왠지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그것과 흡사하다. 한번 들어보자.

강물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되지 음 알게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 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음---(하략)


고은 선생은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을 큰 일이라 했고, 안치환은 '산과 강물은 저녁이 되면 서로를 쓰다듬으며 정들어 간다'고 노래하였다. 시인과 가수가 강과 산의 경계에 서서 바라보는 정서가 흡사한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닐 터이지만, '저문 섬진강'은 유독 그러한 모양이다.

유홍준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이시영도 '저문 섬진강'을 이야기 했다. 유홍준은 그의 섬진강 노래에 대해서, "고향의 따스함과 그리움이 짙게 서려 있어, 차창 밖으로 노을을 비껴 보면서 사치스런 낭만이나 화려한 애수를 늘어놓은 우리들의 서정과는 다르다. 그의 시중에서 <형님네 부부의 肖像>({바람 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 12∼13 쪽)은 잔잔한 감동이 가슴까지 저미는 명시"라고까지 극찬하였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45 쪽). 유홍준이 그토록 감탄한 이시영의 섬진강 노래는, 바로 이러하다.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단단한 어깨
이마가 서리처럼 하얀 지리산이 나를 낳았고
허리 푸른 섬진강이 나를 키웠다
낮이면 나를 낳은 왕시루봉 골짜기에 올라 솔나무를 하고
저녁이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먼 곳을 그리워했지
(중략)
우리가 떠난 들을 그들이 일구고
모두가 떠난 땅에서 그들은 시작한다
아침 노을의 이마에서 빛나던 지리산이
저녁 섬진강의 보랏빛 물결에
잠시 그 고단한 허리를 담글 때까지


이시영은 '저녁 섬진강의 보랏빛 물결'에 고향의 포근함을 느낀 것일까? 그 역시 '저문 섬진강'을 예찬하였다.

3. 정희성의 '또다른 저문 강'

모든 시인이 섬진강만을 지칭하여 '저문 강'이라 한 것은 아니다. 정희성 시인은 <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는 시에서 섬진강이 아닌 또다른 강을 '저문 강'이라 표현했다. 유홍준이 가장 좋아하는 섬진강, 바로 저문 섬진강의 시인이 이시영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저문 강'의 시인은 정희성이다. 내가 정희성 시인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버님 말씀>이라는 시 때문이다. 도대체 시인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인데, 고은 선생은 <시인>({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32 쪽)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시인이기 전에 수많은 날을 울어야 합니다
시인은 세 살 때 이미
남을 위하여 울어본 일이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손길입니다 어루만져야 합니다
아픈 이
슬픈 이
가난한 이에게서 제발 손 떼지 말아야 합니다
고르지 못한 세상
시인은 불행한 이 하나하나의 친족입니다

시인은 결코 저 혼자가 아닙니다
역사입니다
민중의 온갖 직관입니다

마침내 시인은 시 없이 죽어 시로 태어납니다
즈믄 날 밤하늘의 거짓 없는 별입니다


라고, 규정지었다. 이 말에 분노하고 억울해 할 시인도 많겠지만, 나는 맞는 말처럼 느껴진다. 정희성의 <아버님 말씀>은 바로 그 느낌을 확신케 해준다.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
그렇다 아들아, 실패한 애비로서 ……
이 땅의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래도 나는 할 말은 해야겠다.
아들아, 행여 가난에 주눅들지 말고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부디 네 불행을 운명으로 알지 말라
가난하고 떳떳하게 사는 이웃과
네가 언제나 한 몸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힘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


80년대 초 대학을 다닐 때, 나는 이 시를 거의 다 외우고 다녔다. 아니 마음 속에 묻고 살았다. "미운 놈 미워할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있는 일이지 않는가?
정희성이 노래한 섬진강이 아닌 또다른 '저문 강'은 어디인가? 우선 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읽어보자.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이 시는 1978년, 그 잔혹한 암흑의 유신시대 말기에 쓰여졌다. 이 시에서 농부가 삽을 씻은 그 강은 썩어 있다고 묘사되어, 섬진강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섬진강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강이 어느 곳을 말하는지 무척 궁금하여, 작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아주 무례한 확인을 시도하였다. 시인은 한강 언저리의 어느 샛강이라고 했다. 예상대로 섬진강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꼭 섬진강이 아니더라도, 시인은 '저문 강'을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미 '저문 섬진강'이 새벽 나절과 한낮의 섬진강까지도 대표하는 상징처럼 되어 바렸기 때문에, 따로 이를 부정하거나 반박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새벽 안개에 아련히 감추어져 아침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섬진강이, 왜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리고 쑥빛으로 깊이를 알 수 없게 잠자고 있는 한낮의 섬진강이 왜 진실되지 않겠는가?

4. 김용택의 '지겨운 여유'

김용택, 그를 흔히들 섬진강 시인이라 부른다. 그가 섬진강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요, <섬진강>이라는 주제로 수십 편의 연작시를 썼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섬진강> 시리즈 중에서도, 내가 볼 때는 역시 첫 번째 시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겠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봐두어서 손해볼 것은 없을 것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이처럼 섬진강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시들을 무려 수십 편을 썼으니, 그를 '섬진강 시인'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이 시를 읽고 나면 영 개운치가 않다. 시에 문외한인 내가 김용택의 <섬진강>을 분석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이미 불손한 태도일터이지만, 아무래도 몇 마디 하지 않고는 불편한 마음을 풀 도리가 없어 무례를 범하게 되었다.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은 왜 마르지 않는가'라고 자문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기 때문"이라고 자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몇 놈이, 그것도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아무리 퍼가도 마르지 않는다"고 장담하였다. 당연하고 지극히 옳은 말이다. 그런데, 몇 사람이 퍼가서 마를 강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섬진강만 유독 그러한 것은, 더욱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애비 없는 자식들이 강물을 퍼간다고 했는지 또한 이해되지 않는다. 대동강 물 팔아먹어 두고두고 구설수에 휘말린 봉이 김선달처럼, 후레자식들이 언제 어떤 강을 말아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적 표현치고는 어설프다는 생각이 든다. 후레자식들에게 화풀이 할 대목이 전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원래 김용택의 섬진강 바라보는 기법이, "큰 물살이 일고 파도가 치며 강 가까이에 있는 밭의 고구마를 다 캐어 놓기도 했고, 논에까지 물이 들어와 다 덮을 때도 있었다. 큰물은 참으로 장관이었다"(김용택, {섬진강 이야기} 1, 열림원, 1999, 64 쪽)라는 식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포악성까지도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직접 고구마를 키우고 벼농사에 땀을 쏟는 농군으로서가 아니라, 교사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는 글을 지으며 가끔 들에 나가 유년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한 채 땀을 슬쩍 흘려보는, 그의 일상이 관성으로 작용한 탓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고추를 붉게 널고', '감자대를 널었으며', '감쪼가리를 털어 말리기도'하는 정겨운 영상만이 묘사할 뿐, 그것을 가능하게 한 진한 땀내음과 지루한 하루의 노동은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즉, 현재 섬진강을 끼고 사는 사람들의 일상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배제된 채, 시간과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작가의 여유로움만 지리하게 서술되어 있다. 결국 그 자신이 그의 글을 "물질의 풍요가 가져다 준 인간 정신의 쓸쓸함과 공허함"(김용택, {섬진강 이야기} 2, 열림원, 1999, 217 쪽, 작가의 말 중에서)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만 멈추어 버린 것이다.


5. '대동강 시인' 정지상의 천재성과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과학성

왠지 모르게 가벼운 김용택의 시는, 천년 전에 살았던 고려시대 천재시인 정지상의 시를 읽노라면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지상이 10대에 썼다는 <送人; 님을 보내며>라는 시는 그의 천재성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비 갠 언덕 위 풀빛 푸른데(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大洞江水何時盡)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別淚年年添作波)


김용택은 '실핏줄 같은 개울물이 모여들기 때문에 섬진강은 마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거의 과학에 가까운 진실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전율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정지상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동강변에서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내기 때문에 대동강 물은 결코 마르지 않으리'라고 전설같이 노래했다. 두 강은 결코 마르지 않겠지만, '마르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전혀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지상을 천재시인으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려 중기의 문인 김황원이 대동강가의 연광정에 올라 먼 산과 들판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상(詩想)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읊조리기를,

긴 성 한쪽에는 넘실거리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큰 들판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다(大野東頭點點山).


라고 해놓고선, 그 다음 구절을 이어갈 생각을 떠올리지 못해 날이 지도록 고심하다가 끝내 눈물을 흘리며 내려오고 말았다고 한다. 정지상이 10대 때에 이미 속살까지도 꿰뚫어 본 대동강을, 김황원은 차마 노래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정지상을 감히 천재라 부르지 않나 싶다.

정지상의 천재성은 곧잘 김부식과 비유되곤 한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러 나선 김부식이 개경에 있던 정지상을 죽여버렸다. 그 죽음이 억울해서인지, 많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高麗史}의 묘청전에는 정지상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김부식이 평소에 정지상과 문장을 경쟁하다가 불만이 있어, 묘청의 난에 연루된 것을 구실로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장을 둘러싼 불만'이 무엇이지는 정확치 않지만, 이규보의 {白雲小說}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져 있다.

정지상이 "사찰에 범어가 그치자, 하늘 빛은 유리처럼 맑다(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는 시구를 짓자, 김부식이 이를 탐내어 자기의 시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끝내 정지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정지상이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해 음귀가 되었다. 김부식이 어느 날 "버드나무 천 가지가 푸르고, 복숭아 꽃 만 송이가 붉다(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고 봄을 노래하자,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그의 뺨을 때리며, "누가 천 가지, 만 송이를 세었으냐? '버드나무 가지가지 푸르고, 복숭아 꽃마다 붉다(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고 해야 할 것이다"고 나무랐다.

소설같은 이야기인지라 믿을 바는 못되겠지만, 그만큼 정지상의 시가 뛰어났음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시가 아름다우면 뭐하겠는가? 김부식의 {三國史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책으로 남아 있는데 반하여, 황지우 시인이 말한 '어느날 흐린 주점에서' 정지상의 시를 뇌까리며 그의 천재성을 부르짖을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결국 천재의 몫은 '외로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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