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교토의 코무덤 (1)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교토의 코무덤 (1)
  •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4.03.20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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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은 이번 주 부터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후속편으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김 원장은 지난 주 까지 70회 째인 '이순신을 추앙한 도고 헤이하치로'편을  마치고, 새롭게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이라는 제하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중·일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外侵) 없이 200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천년 의 도시 교토(京都)에 있는 이총(귀무덤) 안내판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 세력의 대륙 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19세기까지 일본은 임진왜란을 ‘조선 정벌’이라 불렀다. ‘조선을 손봐주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는 의미이다. 여기엔 조선에 대한 멸시와 일본의 우월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일본에 있는 임진왜란 흔적을 찾아 나선다.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천년 의 도시 교토(京都)에 있는 이총(귀무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풍국신사(豊國神社) 앞 야마토 대로변에는 이총이 있다. 이총 주변은 이총 공원이 있고 주택가이다.

이총 안내판을 보았다. 안내판은 2003년에 교토시에서 만들었는데 일본어와 한글로 되어 있다.

귀무덤 耳塚 (코무덤 鼻塚)

이 무덤은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軍民)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행하여 졌다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무덤(코무덤)의 유래이다.

귀무덤(코무덤)은 사적 오도이(御士居) 토성등과 함께 교토에 현존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유적 중의 하나이며 무덤위에 세워진 오륜석탑은 1643년에 그려진 그림 지도에도 이미 그 모습이 나타나 있어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니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교 토 시
평성 15년 (2003년) 3월

이처럼 교토시는 ‘귀무덤(코무덤)’이라고 병기하고 있다. 안내판에 왜 귀무덤(코무덤)으로 병기(倂記)하였을까?

원래 이 무덤은 코무덤(鼻塚)이었다. 1597년 9월 2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보내 온 수만 개의 코를 대불전 서쪽에 묻으면서 봉분 위에 육중한 오륜탑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날인 9월 28일에 히데요시는 세가키(施餓鬼) 법회 즉 공양의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 법회는 상국사 주지 세이코 쇼타이(1548-1607)가 주관하고 400여 명의 승려가 모여

공양하였다. 법회는 겉으로는 비명횡사한 조선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자비심을 베푸는 의식이었지만, 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공과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는 행사였다. 공양의식을 주관한 세이코 쇼타이는 비문에 코무덤이라고 적었다.

한편 1597년 9월 정유재란때 전라도 영광 논잡포에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전 호조좌랑 강항(1567-1618)도 저서 『간양록』 ‘섭난사적’에서 1599년에 ‘교토에서 본 코무덤’에 관한 글을 기술하였다.

「풍신수길이 조선을 재침략하려 할 때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기를,

“사람의 귀는 각각 둘이지만 코는 하나다.” 하고, 군사 한 명이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하나씩 베어서 수급(首級)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것을 왜경으로 수송케 하여 쌓아 놓은 것이 하나의 구릉(丘陵)을 이루자 대불사(大佛寺) 옆에 묻으니 거의 애탕산(愛宕山)의 산허리와 그 높이가 같았다. 혈육의 참화는 이를 들어 가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모아 제사 지내려고 하면서 나에게 제문을 청해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지었다.

“코와 귀는 서쪽에 묻혀 언덕을 이루었고, 뱀처럼 사나운 놈들이 동쪽에 감추어 있도다. 마른고기 되어 소금에 절이고 물고기 밥으로 배 불렸으니, 차마 향불을 올리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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