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잠을 자고 있는 동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깨어나 보면 어제 아침과 같이 날이 밝아 있고, 풍경은 벌거벗은 겨울 숲 그대로다. 어쩌다 비가 온 밤도 있어 아침에 땅바닥이 물기로 번들거려 보일 때도 있지만 아직은 봄이 아니라서 풍경은 늘 잿빛으로 우중충하다.
그동안 봄도 겨울도 아닌 흐릿한 날들을 밀쳐내는 기분으로 겨울이 빨리 갔으면 하고 나는 계절의 등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랬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거실 창으로 하얀 바깥 풍경이 한가득 안겨 왔다.
간밤에 세상모르고 잠든 새 나는 갑자기 어제와는 전혀 다른 설국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겨울이 떠나가는 마지막 인사로 아름다운 엽서 같은 겨울 풍경을 내게 선물한 느낌이다. 간밤에 눈이 무척 많이 내렸다. 나무의 실가지에도 눈이 흐트러짐 없이 곱게 쌓여 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밤으로 소복소복 눈이 밤새 내렸나 보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아름다운 설경을 찰칵찰칵 찍어 두었다. 올겨울에 본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설경을 오래 기억해두고 싶었다. 아침 식사를 대충 먹고 나서 나는 설국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영화 장면처럼 하얀 눈밭에 키대로 누워볼까 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연신 카메라를 켜고 버튼을 눌러댔다. 마치 설경을 모두 내 스마트폰에 끌어다 집어넣을 것처럼. 뭐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름다운 눈 내린 풍경 속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순간, 이 세상은 참 아름답다고 찬탄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이렇게도 황홀한 설경 속에서라면 그는 마침내 신의 현현(顯現)을 보고야 말 것이다. 나무들은 이따금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지 나무에 쌓인 눈 뭉치들을 이따금 땅으로 떨어뜨리곤 한다. 그때마다 부서지는 눈가루가 내 옷 위로 날아와 앉는다. 나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눈부시게 찬란한 설경을 내가 다 차지해도 된단 말인가? 내가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 순간 아름다운 설경 속에서 나는 분명코 어떤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존재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은 강렬했다.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이런 설국의 모습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내 느낌은 이랬다. 이 아름다운 설경은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내게 또 다른 세상이 어디엔가 있음을 잠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은주가 올라가자 눈으로 덮었던 설경이 얼마 안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눈으로 덮여 있던 지상의 세계가 어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잠깐 동안 내 눈에 비쳤던 찬란한 설경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잠시 꿈을 꾸고 있었던가? 환상을 본 것인가? 길은 눈이 녹아 질컥거리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어제처럼 붕붕거린다. 다시 일상의 본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잠시 설국의 시민이 되어 누렸던 황홀과 기쁨도 건듯 사라져버렸다. 나를 여기에 내버려 두고 어딘가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고 보면 겨울은 신비로운 계절이다. 어떻게 그렇게도 아름다운 설국을 잠깐 비춰 보이고는 후딱 거두어가 버리는 것일까. 무엇이든 사물에서 상징과 비유를 찾기 좋아하는 나는 오늘 내가 잠시 들어가 본 설국의 풍경이 신들의 왕국처럼 보인 까닭을 곰곰 더듬어본다.
설경은 단순히 기상학적으로 차가운 대기에 물기가 얼어 눈이 되어 내린 풍경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연은 시인 보들레르가 말한 대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올겨울에 나는 무척 우울했었다. 날씨 탓이려니 했다. 늘 구름이 낀 침울한 날씨에 질렸다.
그랬는데 오늘 내가 본 아름다운 설경이 그런 우울한 심정을 씻어내 주었다. 겨울에 눈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보기 힘든 절경이었다. 겨울 설경의 극치라고 할까. 나는 사람으로부터보다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위로를 받는 것 같다.
오늘 내게 잠시 나타났던 그 설경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국으로 들어가 잠시 그 왕국의 시민이 되었던 일은 오래도록 내게 감명을 줄 것이다. 눈에 덮인 풍경은 아름답고 눈에 덮인 추억은 더욱 아름답게 내 마음속에 자리할 것이다. 인생이 축복이라는 느낌이 든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