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감
근자감
  • 문틈 시인
  • 승인 2024.01.2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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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자감’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세계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와 관련한 신문 기사에서였다.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라고 허 교수는 말했다. 허 교수는 수학의 난제 중의 난제를 몇 십년 만에 풀었는데 그 공로로 이 이름난 상을 받았다.

이런 교수가 근거 있는 자신감이 아니라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어느 대학 초청 강연에서 후배 대학생들에게 말했으니 그냥 흘려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즉, 실력과 능력을 배양해야 자신감이 생긴다는 사회법칙에 순응해 살아온 것이다. 한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며칠 전 지인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귀동냥하려 전화를 걸었더니 날더러 너무 세상일에 걱정하지 말고 근자감을 갖고 살아가라 했다.

내가 지인에게 한 불평은 우리 사회의 정치 과열로 인한 편가르기 대결 현상이었다, 이번 총선에 투표를 안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나를 달래듯 근자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한국에 오래 머물렀던 한 중국인이 한국을 떠나면서 하는 말이 ‘한국인들은 자기 가족의 일보다 국가를 더 걱정한다’라고 했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 했다.

공연히 남들 하는 일에, 특히 혐오감이 드는 정치판에 실망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란다. 하기사 무엇이든 너무 가깝게 보면 안 보이는 일이 많다. 손바닥을 본다고 눈을 덮을 듯이 가깝게 갖다 대면 손바닥이 아예 안 보인다.

지인은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므로 먼저 내 자신이 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 자신감, 긍지를 갖고 용기 있게 살아야 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읽을 책도 많고 쓰는 중인 글도 적잖다. 그 일만 해도 다른 일에 눈이 팔릴 겨를이 없다.

20여 년 전 업무 관계로 우즈베기스탄에서 온 고려인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 분의 연세가 90이었다. 당시 나이 90은 지금과 달리 무척 드물었다. 장수비결을 물어보았더니 ‘남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 했다.

사람들이 남 말하기를 좋아해서 이러쿵저러쿵하더라도 전혀 관심을 갖지 말라 했다. 세월이 지나가면 그런 것들은 다 잊혀지고 마는 하잘 것 없는 것이란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왔단다. 사실 말로는 다 수긍이 가고 그럴싸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힐 때는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세상일에 신경을 끄고 살고 싶어도 쉽게 그래지지 않는다. 고대 중국의 신화 속 인물인 요(堯) 임금 때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처럼 귀를 막고 살 것인가. 아무리 해도 그러기는 어렵다.

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허준이 교수는 “솔직히 저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는 뭔가 마음이 편했다”라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라고 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여러 상을 받는 등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갖고 시작을 하면 난제에 부딪혔을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며 “자신감에 근거가 없으면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목표에 부딪혔을 때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유연성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역설 같지만 일리 있게 들린다.

근거 있는 자신감보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가지는 유연성을 강조한다. 나는 지금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너무 가까이 보고 있는 것 같다. 직장에서 은퇴한 내 형편에서 볼 때 지인의 말대로 나는 나 자신에 집중해서 살아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렇고, 이스라엘 전쟁이 저렇고, 대만 전쟁이 곧 일어나면 한반도에도 전쟁 기운이 뻗칠 수 있다고 삑, 삑, 경고음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 뉴욕타임즈에서도 향후 몇 달 내에 한국에 전쟁이 날 수 있다는 뉴스가 떴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근자감을 가질래도 가질 수가 없다. 근자감이라는 것은 학문 영역에서나 제한적으로 쓰일 태도이지, 인생이나 사회 전반의 문제를 푸는 공식으로 쓰기에는 무리한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되레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쪽에 서 있고 싶다. 그러려면 근거, 즉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력이 있어야 무슨 일에든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은 그냥 살기에도 하루하루의 삶이 너무 팍팍하다. 아무래도 나는 근자감과는 멀리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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