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4회]-순천 왜교성 전투 (4)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4회]-순천 왜교성 전투 (4)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2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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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진린이 심하게 다툰 이후, 진린은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사람의 일을 살펴봤는데,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져 가니 멀지 않아 공에게 화가 마칠 것입니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하여 무후(武候 제갈량)의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남해 충렬사 

1598년 11월 17일에 이순신은 진린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는 충성이 무후(武候)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합니다. 세가지 모두 다 무후만 못하므로 비록 무후의 법을 쓴다 한들 어찌 하늘이 들어줄 리 있겠습니까?”

이 날 초저녁에 고니시가 봉화를 올려 남해에 있는 적들과 서로 연락 하였다. 고니시가 구원을 요청하고 남해의 왜군이 호응한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군관 송희립과 해남현감 유형 등 여러 장수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먼저 송희립이 말했다.

“순천왜성의 왜군을 구하기 위하여 시마즈 등의 왜군이 구하러 올 것입니다. 순천을 포위하고 있는 형태로 구원군에 대처한다면 앞 뒤 양쪽에서 적을 맞는 것이 되므로 바깥 바다로 전선을 움직여 전투를 벌여야만 합니다.”

해남현감 유형도 거들었다.
“왜군 구원군을 먼저 격퇴하고 나서 고니시의 귀로를 차단하여야 합니다.
”마침내 이순신은 남해 쪽으로 출전하여 구원군부터 격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날 이순신은 마지막 ‘난중일기’를 썼다.

11월 17일
"어제 복병장인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등이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 나갔던 일을 보고하였다. 왜적은 한산도에서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

11월 17일 초저녁에 순천왜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봉화를 올려서 사위 소 요시토시(1568-1615)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남해 창선도에 도착한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와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가 조명수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는 것을 알고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광양만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를 눈치챈 이순신은 모든 장수들에게 군비를 엄하게 하고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8일 오후 6시경에 이순신은 명나라 도독 진린에게 협공을 당하느니 남해에서 오는 왜군부터 먼저 격퇴하고 나서 고니시의 귀로를 차단하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철군하는 왜군을 그냥 돌려보내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수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고 결연히 말하면서, 단독으로라도 출전하겠다고 하자 진린은 별수 없이 이순신의 뜻을 따랐다.

11월 18일 밤 10시경에 조명연합수군은 480여 척(조선 수군 8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의 배에 군사 1만7천 명(조선 수군 7,328명 ,명나라수군 1만명)을 싣고 왜교성 앞바다를 떠나 노량(露梁)으로 노를 저었다.

선봉은 이순신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이었고, 진린은 부총병 진잠,유격장 계금 등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전라우수사 안위,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 충청수사 오응태, 해남현감 유형, 가리포 첨사 이영남, 순천부사 우치적,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안골포 만호 우수, 사도 첨사 이섬, 능성현령 나대용, 발포만호 소계남, 군관 송희립 등이었고, 명나라 수군은 부총병 등자룡, 부총병 진잠, 유격장 허국위·계금·심무·양천운 ·마문환·장량상 등이었다.

창선도에서 노량으로 오고 있는 일본 수군은 함선 500여 척에 수군 15,500명이었다.
사천의 시마스 요시히로가 300척에 8천 명, 남해의 소 요시토시가 1천 명,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5천 명, 부산에서 온 데라자와 마사노리가 1천 명, 다카하시 무네마스가 5백 명이었다.

사천성에서 명나라 제독 동일원을 물리치고 창선도로 철수한 시마즈는 노약한 군사들과 포로로 잡은 조선 사람들을 부산포로 보낸 다음 정예병만을 데리고 선봉에 나섰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사진 남해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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