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2회]-순천 왜교성 전투 (2)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2회]-순천 왜교성 전투 (2)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11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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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0월 4일에도 조명 연합수군은 공격을 계속했으나 육지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이 호응하지 않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분격하여 명 수군 도독 진린은 유정을 찾아가 엄중 항의하였다.

 순천왜성 입구

5일에 이순신은 서풍이 강하게 불어서 출항할 수가 없었다.

6일에 유정은 철수할 조짐을 보였다. 6일의 ‘난중일기’이다.
“맑았으나 서북풍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기를,‘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합니다.’하였다. 분하고, 분하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도원수 권율의 예상대로 10월 7일에 명나라 제독 유정은 왜교성의 포위를 풀었다. 9일에 유정은 각종 무기와 군량 수천 석을 방치한 채 남원 부유창(富有倉)으로 완전 철수하고 말았다.

유정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9일에 유도를 출발하여 12일에 고흥 나로도에 도착하였다. 조명연합군의 왜교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11월 초에 도원수 권율이 유정이 순천 예교로 출발하였음을 치계하였다.

"유제독이 11월 1일 다시 공격하기 위해 예교(曳橋)로 출발하였고, 진유격의 군대는 다음날 떠났습니다. 마병(馬兵)도 다시 공격하려 한다고 하지만 아직 기일(期日)을 정하지 않고 있는데 현재 왕참정(王參政)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고니시와 강화(講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는 ‘저들을 속여 소굴에서 나오게 해서 바다 건너는 것을 기다려 협공하려고 한다.’고 말하나, 사실은 구차하게 수습하려는 계책인 바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11일)

문지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 출입구)
문지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 출입구)

이즈음에 일본 특사는 왜군 지휘관들에게 11월 15일까지 부산으로 철수하여 귀국하라는 지시문을 전달했다. 울산 장생포의 가토 기요마사, 경상도 사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고니시는 유정과 은밀하게 화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유정에게 순천왜성을 고스란히 물려주기로 하고 철수를 보장받고자 했다. 유정도 긍정적이었다.

이때 유정은 오광 부총병에게 40명을 내주어 왜교로 들여보내니 고니시는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 오광은 함께 간 40명을 인질로 넘겨주고 화친의 일을 의논하고 돌아왔다.

이 날 선전관 허전은 중국 군대의 전투 상황에 대해 아뢰었다.
"(...) 유 제독이 요양의 기생 하나를 데리고 왔고 또 우리나라의 여자가 왜적의 소굴에서 나와 오 부총병의 진영에 도착했는데, 유 제독이 그 여자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또 불러들여서 모두 남자의 복장을 입히고 수행하게 하니, 휘하의 장수들이 분개한다고 합니다.

신이 왕참정(王參政)의 진영에서 들으니, 중국인 오자화라는 자가 왜적의 소굴에 들어가 고니시를 보니, 고니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죽고 국가에 큰 변고가 있어서 내가 들어갈 것이다.
원컨대 도사(都司) 오종도를 인해 제독 유정을 뵙고 10월 28일에 즉시 철병하겠다.’고 하므로 10월 22일에 오종도가 적중(賊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2일)

허전이 보고한 실록 말미에는 사신(史臣)의 논평이 실려 있다.
“고시(古詩)에 ‘여자가 군중에 있으면 사기가 드높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여색(女色)의 해는 사람의 마음을 고혹시키고 일을 실패하게 한다. 비록 평시라도 경계해야 하는데 더구나 적진과 대치하고 전쟁할 때이겠는가. (...) 유정이 황제의 명을 받아 만 리나 되는 곳에 출정하여 몸소 삼군(三軍)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적과 30리 거리에 대치하고 있는바 성패 존망(存亡)이 순간 사이에 달려 있는데도 요양의 기생과 적진의 요사한 계집을 좌우에 두고 있으니, 군사들이 분개하여 싸움할 뜻을 잃고 교전도 하기 전에 먼저 패해 도망가 기(旗)를 버리고 종적없이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된 것이 당연하다. (...) 황제가 위임시켜 보낸 명령을 저버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11월 9일에 이순신은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완도 고금도를 떠났다. 조명 연합함대는 9일에 백서량(여수시 남면 횡간도)에 진을 치고, 10일엔 전라좌수영 앞바다에 도착하여 11일에 순천 앞 묘도(猫島 고양이 섬 ; 여수시 묘도동)에 진을 쳤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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