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금꽃 피는 고향에도
능금꽃 피는 고향에도
  • 시민의소리
  • 승인 2023.11.18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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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가고 싶어도 갈 고향이 없다. 최무룡이 부른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은 먼 옛날의 이야기다. 고향에 가본들 집집마다 빨간 감이 열리고, 대숲에 바람이 불 때마다 우우우 하고 소리내는 고샅길이 흙담장을 따라 돌던 그런 고향은 없다.

시인 정지용이 그의 시 ‘향수’에서 노래한 ‘옛이야기가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여러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엣 고향마을에 들렀더니 언덕빼기 뒷산과 당산나무만 그대로 있고, 마을은 시멘트 도로로 넓혀져 있고, 초가집은 사라져 현대식 양옥집들로 바뀌고, 더구나 우리가 살던 집은 헐려 그리로 도로가 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고,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하는 과정에서 노래나 시에 나오는 고향은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내 추억어린 고향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서운하고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는 사람이 다르고 현대문명이 물밀듯 물결쳐오는 그런 판에 어떻게 옛날의 고향이 그대로 온전히 거기 있으랴.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깨복쟁이 동무들과 개울에서 멱감던, 연실에 께진 사기그릇 가루를 묻혀 서로 연 싸움을 하던, 보리 모가지를 잘라 돌무더기에 불을 피워 구워먹던, 추녀에 새끼를 키우던 참새를 초롱불을 비추며 잡던, 가을 논에 가서 메뚜기를 잡아 빈 병에 가득 잡아와 구워먹던, 그런 아름다운 기억들은 고스란히 내 추억이 되어 뇌리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고향에 얽힌 추억들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내 인생의 보물 같은 것들이다. 어린 시절의 고향을 생각하면 삭막한 도시생활에 지친 내 마음을 푸근하게 위로해준다. 고향 생각이 나를 힐링시켜 주는 것이다.

나야 그래도 그립고 정다운 그런 고향 모습을 추억 속에서나마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만 컴퓨터 게임, 지하철, 아파트 같은 도시 문명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MZ(엠지) 세대는 고향이란 말조차 생경하게 들릴 듯하다.

대부분 병원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도시 학교에 다니며 치열한 경쟁사회에 시달리며 살아온 지금 세대들은 고향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니, 고향이라는 말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 것일까.

내 세대들만 해도 여행 중, 혹은 모임에서 통성명을 할 때면 으레 ‘고향이 어디십니끼?’하고 말머리를 트면서 곧 이런저런 이야기 동무가 되곤 했는데 새로운 세대들은 ‘고향이 어디냐?’하면 무어라 대답할는지 참 궁금하다.

강남 서초구, 광주 남구, 부산 해운대구, 이런 식으로 대답할까? 아니면 남구 진월동 아파트, 서초구 서현동 단독주택, 부산 해운대구 엘시티…. 나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인 동생은 딸들이 어디 출신이라고 하지 고향이라는 말을 잘 안 쓴다고 한다. 고향이라는 말을 잃어버린 세대들은 고향 대신 출신으로 환치하여 나와는 다른 추억들이 뇌리에 새겨져 있을 것 같다. 광주 출신, 서울 출신, 부산 출신.

그렇긴 하나 어쩐지 다른 먼 나라의 옷을 입은 느낌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고향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이라고 나와 있다. 덧붙여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이다’라고도 나와 있다. 어느 쪽을 취하든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이제 고향산천이 상기하는 그리움, 정다움, 안타까움 같은 정감은 현실 공간에서 찾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이 타향살이를 하면서 그 타향을 고향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기묘한 삶을 살고 있어서다. 말하자면 부평초 같은 삶, 노마드의 삶을 살고 있으니 내가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그런 고향 경험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파트값이 오르면 얼른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는 현실에서 고향의 의미는 국어사전에서나 찾아야 할 판이다.

시인 김소월은 고향을 이렇게 노래한다.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 아, 꿈에서는 항상 고향입니다.’(‘고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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