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그네
가을 나그네
  • 문틈 시인
  • 승인 2023.10.1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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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어디 먼 데로 홀로 정처 없이 떠나고 싶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아니라 옛사람들이 미투리를 몇 켤레 등에 메고 걸어가던 것처럼 말이다. 간편한 차림으로 생수 한두 병 작은 가방에 담고 걸어서 발 닿는 대로 멀리 떠나고 싶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보지 못한 먼 산길, 들길, 언덕, 바닷가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고 싶다. 길을 걷다가 어디메 쓰러져 스르르 잠이 들어, 내 인생을 길 위에서 마친다 해도 길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고 싶다.

벌써 길에는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한해의 할 일을 마쳤으니 벌거벗은 나목으로 서 있는 가을 나무들도 나처럼 하마 걷고 싶은지 모른다. 나뭇잎 새를 다 떨군 나목이 쓸쓸히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무척 슬퍼 보이는 풍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무는 뿌리 내린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서 있다. 한번 씨앗이 떨어져 움이 트면 큰 나무가 되어 자손을 퍼뜨리고 고목이 되면 그 자리에 쓰러져 일생을 마친다. 가을이 와서 잎새를 떨군 나무는 마치 도를 깨달은 성자처럼 곧게 서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걷는 길이 흙길이었으면 한다. 아침마다 개천을 따라 둑 위로 인도를 조성해 놓은 길을 즐겨 걷는데 걸을 때 발에 닿는 느낌이 대지를 차단한 시멘트 길이라서 딱딱하다. 포장이 안 된 울퉁불퉁한 흙길을 걸을 때의 느낌을 주는 정겨운 시골길을 나는 생각한다. 땅의 기운이 발바닥에서 내 머리끝에까지 이를 것 같은 흙길이 그립다.

일본의 시인 바쇼(芭蕉)는 ‘해도 달도 과객’이라며 인생도 나그네라 했다. 인간은 누구나 잠시 시간을 빌려 쓰고는 영원히 떠나가는 과객이다. 이 우주에 홀연히 왔다가 떠나가는 외로운 손님이라는 말이다.

내가 즐겨 읽는 두보는 ‘등고’(登高)라는 시에서 가을을 처연히 읊고 있다.

‘바람이 빠르며 하늘이 높고 원숭이의 휘파람이 슬프니/ 맑은 물가 흰 모래톱에 새가 날아 오는구나/ 끝없이 지는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다함 없는 긴 강은 잇달아 흐르는구나!/ 만리에 가을을 슬퍼하여 늘 나그네가 되니/ 한평생 많은 병 앓는 몸이 혼자 누대에 오른다/ 온갖 고난에 서리 맞은 귀밑머리 심히 슬퍼하노니/ 늙고 초췌함에 흐린 술잔을 새로 멈추었노라.’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곧 눈물방울이라도 맺힐 듯 감정이입이 되어 세상을 이리저리 걷는 나그네가 된 느낌이다. 걷고 또 걷고 그러다가 지치면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나를 이 세상으로 내보낸 우주를 향하여 큰 소리로 묻고 싶다. 날, 어쩌란 말이냐, 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에 무슨 정답이라도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진다. 정말 철학자들이, 현자들이 말하는 대로 인생은 고해고, 슬프고, 외롭고, 도로에 그치는 것뿐일까.

나는 한해가 사시사철로 이루어져 계절마다 자연이 열심히 길쌈하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가진 것들에겐 궁극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무엇인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젊은 날 요양소에서 세상과 떨어져 격리되어 있을 때 나 같은 환자들을 위로하려고 찾아온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학생이 대표로 나서서 환자들 앞에 서서 위문 글을 읽었다.

‘인생을 함부로 살아온 사람은 죽음이 큰 문제가 될 것이지만, 인생을 진지하게 산 사람은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 학생이 쓴 글인지, 어디서 인용한 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구절이 지금껏 잊히지 않는다. 이를테면 죽음이 문제가 안 되는 삶, 그것이 정답을 구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빈 들판, 낙엽이 진 숲, 풀빛이 바랜 언덕길을 걷는 외로운 영혼을 하늘도 보고, 새도 보고, 구름도 바라볼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바닷물에 스며드는 강물처럼 거대한 우주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나는 모든 인간의 비극은 나를 주인으로 삼고 인간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나는 결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그저 피조물이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를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 파도가 일었다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더 큰 나, 전 우주라는 나와 합일되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이 가을을 나그네처럼 무작정 걷고 싶다. 길은 길로 멀리 이어져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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