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4회]-명량해전 전야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4회]-명량해전 전야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0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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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 17일에 이순신은 보성을 떠났다.
18일에 이순신은 장흥 땅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8척의 전선을 인수받았고, 19일에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하였다.

해남 울돌목 거북선
해남 울돌목 거북선

20일에 이순신은 회령포 포구가 좁아 해남 이진(梨津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아래 창사로 진을 옮겼다.

그런데 이순신은 21일 새벽 2시쯤에 곽란(癨亂 음식이 체하여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오히려 혼수상태에 빠졌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22일에도 이순신은 곽란이 심해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대변도 보지 못했다. 견디다 못하여 23일에는 배에서 내려 포구 밖 민가에서 쉬었다.

24일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이순신은 정오에 어란포(해남군 송지면 어란 마을) 앞바다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

25일에 이순신은 어란포에 머물렀다. 아침을 먹을 때 포작(배에서 지내는 어부)이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 끌고 가면서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냈다. 이순신은 헛소문을 낸 포작인 2명의 목을 베어 사람들이 널리 보도록 하니, 군중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26일 늦게 탐망 군관 임준영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왜적의 배가 벌써 이진(梨津)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수군이 벌써 코앞에 왔다.

이날 선조가 임명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부임하여 왔다. 그런데 그는 전투에 필요한 격군과 그리고 무기 등을 가지고 오지 않고 몸만 달랑 왔다.

27일에도 이순신은 어란포에 머물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찾아왔는데 두려워서 떠는 빛이 역력하였다.

28일 오전 6시에 왜선 8척이 불시에 습격하여 왔다. 조선 수군들은 겁을 먹고 경상우수사는 피해서 물러나려고만 하였다. 이순신은 직접 선봉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움직였고 적선들이 물러갔다.

이어서 조선 수군은 해남 땅끝 마을 부근인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왜적을 추격하였는데 더 쫓지는 않았다. 뒤따르던 왜군 배가 50여 척이라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에 이순신은 장도로 진을 옮겼다. 장도는 해남 어란포와 진도 벽파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이다.

8월 29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건너가 진을 쳤다. 벽파진은 해남과 진도를 오가는 나루터로서 진도 섬의 입구이고 명량해협의 초입이다. 이순신은 여기에서 9월14일까지 머물렀다.

9월 2일 새벽에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이 일로 수군의 동요가 매우 심하였으리라. 그런데 배설은 1599년 3월에 고향 선산에서 도원수 권율에게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9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은 북풍이 강하게 불어 배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바람이 잠잠해 진 뒤에는 추위가 엄습하여 사공들이 추위에 떨었다. 수군은 군복도 변변하지 못하였고 식량도 부족하였다.

9월 7일에 바람이 그쳤다. 정탐군관 임중형이 와서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그들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두 번 세 번 엄하게 타일렀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오후 4시경 왜선 13척이 쳐들어왔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우리 배들은 닻을 거두고 바다로 나가 반격하였다. 그러자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이순신은 더 이상 쫓지 않았다.

벽파진으로 돌아와서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명령하였다.
“오늘 밤에 반드시 왜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다. 모든 장수들은 단단히 준비하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

과연 밤 10시경에 왜선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즉시 앞장서서 지자포를 쏘며 대응하였다. 이 날 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4차례 접전하였는데, 자정이 되자 왜군이 물러갔다.

다행히도 9월 8일에 왜군은 쳐들어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어제 일어난 일본 수군의 공격에 심각성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장수들은 침묵만 지킬 따름이었다.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이었다.
이순신은 제주도에서 끌고 온 소 다섯 마리를 잡아서 녹도만호와 안골포 만호에게 주었다. 군사들은 모처럼 고깃국을 먹었다.

오후 늦게 왜선 두 척이 감보도로 들어와 정탐하였다. 감보도는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벽파항 바로 앞에 있는 섬이다. 왜군이 벽파진 바로 코앞까지 와서 정찰한 것이다. 이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추격하였다. 그러자 왜군 정탐선은 급히 도망갔다.

10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은 이순신은 별 징후 없이 지냈다.
그런데 13일 밤에 이순신은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이 범상하지 않았다. 임진년에 크게 이겼을 때의 꿈과 비슷하였다. 무슨 징조인지 잘 모르겠다.”

9월 14일에 이순신은 중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탐망군관 임준영이 보고하기를 ‘전선 2백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김중걸이 전하는 말을 전했다.

“왜적들이 모여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많이 쏘아 죽이고 배를 태웠으니 극히 통분한 일이다.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런 후에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의논했습니다. ”

이순신은 곧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니 빨리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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