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경우
어느 시인의 경우
  • 문틈 시인
  • 승인 2023.09.3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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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젊었을 적 한때를 빼놓고는 일평생 시를 썼다. 구십을 바라보는 긴 인생의 여정에서 시를 빼고는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훌륭한 시인으로 존경받고 그를 기념하는 문학관도 생겼다.

학교 교과서에도 그의 시가 여러 편 실려 학생들의 감수성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의 시 몇 편을 암송할 수 있다. 벵골을 사랑한 인도의 시인 타고르를 떠오르게 하는 이 땅을 무척 사랑한 시인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젊은 시절에 그 시인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다른 어느 시인이 폭로하자 신문 방송이 연일 보도하고 결국 그는 시단에서 빛의 속도로 퇴출당하다시피 사라졌다.

그의 시는 즉시 교과서에서 빠지고, 문학관도 없어지고, 사실상 시인으로서 사망선고를 받은 꼴이 되었다. 일평생 쌓아온 시력(詩歷)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재판이 몇 차례 있었으나 시인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언제인가 이제 책을 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지 어느 출판사에서 슬그머니 시인의 새 책을 펴냈는데 산지사방에서 성토해대는 바람에 그 책을 회수하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출판사는 사과하고 책을 거두었다.

나는 이런 사태를 지켜 보면서 과연 시인이란 무엇인가, 아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와이셔츠를 입고 거리에 나갔다 오면 옷깃이 거뭇하게 더럽혀지기 일쑤다. 그래서 와이셔츠를 여러 벌 장만해 놓고 날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간다.

어느 한때 실수를 저지른 사건이 부메랑이 되어 평생 시인으로 살아온 그의 값진 이력을 먹칠하고 시인으로서 더는 시를 발표하지 못하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생각해 보니 참 무서운 세상이다. 국회의원은 죄를 짓고도 사면받으면 다시 출마해 국회로 들어가 이전의 모습으로 멀쩡한 인간이 된다. 떵떵거리며 권력을 누린다. 연예인도 상당수가 그렇다. 언제 잘못을 저질렀느냐 하며 TV 화면 속에서 깔깔대며 웃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시인을 사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유독 시인에게 엄중하고 혹독한 국문을 한다. 시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바친 탓에 그토록 배신감이 더 컸던 것일까. 그 시인에겐 새로 입고 나갈 여벌 와이셔츠가 없다. 야속한 일이다.

한 인간으로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참회를 하면 용서를 하는 것이 사회가 굴러가는 시스템이다.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 군중에게 말한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군중은 돌을 내려놓고 하나둘씩 사라졌다.

한 사람의 훌륭한 시인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사회 구성원의 사랑을 받고 지지받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마치 비행기 조종사 한 사람을 양성하는 데 수십억 원이 드는 것처럼 시인은 그보다 더한 각고의 노력이 드는 것이다. 존경하고 사랑했기에 잘못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은 공자가 말한 바대로 사무사(思無邪) 즉 삿됨이 없어야 하는 존재이니까. 시인은 ’이슬을 먹고 사는 여치’ 같아서 한없이 맑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 사회가 시인을 대하는 태도인 것 같다. 시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거기서 나오는 듯하다.

나는 시인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워주고 다시는 노래하지 말라는 이 땅의 엄한 여론에 전율한다. 어느 누구도 나서서 그를 감싸 주지 못한다. 악성 베토벤은 말한다. “누구든지 내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은 내가 겪어야 했던 고난을 겪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자부심에 벅찬 말이다.

그 시인은 지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내 시를 이해하는 사람은 내게 돌을 던져도 좋다.” 나는 그 시인이 다시 시를 쓰기를 바란다. 시련을 겪은 시인의 시는 진주처럼 더욱 빛날 수도 있을 것이기에 그런 희망을 품어 본다.

시인에게 죄를 묻는 것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인을 매장하고 뚜껑을 덮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못질을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더구나 시인은 자신을 변명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누구도 시인의 노래를 빼앗아 갈 수 없다. 여름이 결코 여치의 노래를 빼앗아 갈 수 없듯이.

인생의 끝자락에 당도한 시인에게 다시 노래하도록 하면 안될까. 나는, 설령 그 시인이 큰 죄를 지었음에도 그의 전 인생을 바쳐 쓴 열 줄의 좋은 시를 읽고 싶다. 카나리아는 죽을 때 더욱 아름답게 운다는데.

나는 지금 생각을 그릇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데도 아주 조심스럽다. 아, 시인이여, 그대는 내 손이 닿지 않는 너무 멀리에 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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