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1회]-이순신, 보성에 머무르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1회]-이순신, 보성에 머무르다
  • 박병모 기자
  • 승인 2023.09.11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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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7월 하순에 왜군은 울산 죽도성에서 회의를 열고 우군과 좌군으로 나누어 전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전라도부터 침공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따른 것이었다.

석주관 칠의사 묘
석주관 칠의사 묘

우키타·고니시·시마즈 등이 이끄는 5만 6천 명의 좌군은 하동,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에 도착하고, 모리 히데모토와 가토가 이끄는 6만 명의 우군은 거창, 진안을 거쳐 전주로 가도록 하였다.

8월 3일에 왜군은 진주를 함락시키고 하동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8월 4일에 오후에 이순신이 곡성에 이르니 관아와 여염집들이 온통 비어 있었다. 이순신은 곡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8월 5일 아침 식사 후에 옥과(곡성군 옥과면)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 찼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이들을 타일렀다. 피난민들은 울부짖고 곡하면서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말했다.

옥과현으로 막 들어설 때 이순신은 이기준 부자를 만났다. 이기준은 거북선 돌격장을 한 사람이다. 고을에 이르니 정사준과 정사립이 마중 나와 함께 이야기 하였다.

8월 6일에 이순신은 옥과에 머물렀다. 송대립은 왜적의 동태를 시시각각 파악하여 이순신에게 동향 보고하였다.

전쟁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니시의 좌군은 사천·남해 등지를 분탕질하고, 가토의 우군은 초계·함안을 통과하였다. 진주 목사는 정개산성을 버리고 경상우병사는 악견산성을 버렸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퇴각하여 옥과로 향하였다.

8월 7일에 이순신은 일찍 떠나 순천으로 갔다. 전라병사 이복남의 군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있었다. 이순신 일행은 이들에게서 말 3필과 활과 화살 약간을 빼앗았다. 이순신은 곡성 강정마을에서 잤다.

8월 7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구례를 점령하였다. 석주관을 지키고 있던 구례 현감 이원춘은 적의 기세에 눌려 남원으로 퇴각했다. 구례 의병들은 석주관을 지키다 순절했다.

이순신과 왜군은 간발의 차이로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왜군은 남원으로 향하고, 이순신은 곡성에 머물렀다.

8월 8일 새벽에 곡성을 떠난 이순신은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을 먹었다. 부유창은 전라병사 이복남이 명령하여 불을 질렀기 때문에 재만 남아 있었다. 광양현감 구덕령, 나주 판관 원종익 옥구현감 김회온 등이 부유창 아래에 있다가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아났다.
이순신이 말에서 내려 명령을 내리자 한꺼번에 나와 절을 하였다. 이순신이 왜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만 하느냐고 크게 꾸짖자, 그들은 모두 그 죄를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돌렸다.

저녁때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인적이 드물었다. 스님 혜희(惠熙)가 이순신을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이순신은 그에게 승병장 직첩을 주었다.

순천부에는 관청과 창고에 곡식과 군기 등이 그대로 있었다.
달아난 병사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 일은 오히려 이순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순신은 병기 가운데 장편전은 군관들을 시켜 짊어지게 하고, 총통과 같이 운반하기 어려운 것은 깊이 땅에 묻고 표시를 하도록 하였다.

8월 9일에 이순신이 낙안(순천시 낙안면)에 이르니 망가는 많은 백성들을 보았다. 까닭을 물어보니 모두들 말하기를 “전라병사 이복남이 왜적이 가까이 왔다고 미리 겁을 먹고는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기 때문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간 것”이라고 하였다. 관청에 들어갔더니 인기척이 전혀 없었고, 관청 건물과 창고와 병기들이 모두 다 타버린 뒤였다.

이순신은 보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군수 고봉상이 합류하였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은 ‘이충무공행록’에서 ‘8월 3일에 진주에서 출발할 때 15명밖에 안 된 군사가 순천에서는 60명이 되었고 보성에 이르렀을 때는 120명으로 늘어났다.’고 적었다.

이 날 저녁에 이순신은 보성 조양창(보성군 조성면)에 도착했다.
다행히 창고의 곡식은 봉인된 채 그대로 있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많은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군졸 4명을 시켜 조양창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8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보성에서 머물렀다. 보성은 이순신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하였다.

8월 10일에 이순신은 몸이 불편하여 김안도의 집에서 계속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도 같이 있었다. 8월 11일 아침에 이순신은 거처를 양산원의 집으로 옮겼다. 집주인도 벌써 바다로 피난하였는데 곡식이 집에 가득 쌓여 있었다. 늦게 송희립과 최대성이 보러 왔다.

8월 12일 아침에 이순신은 장계의 초안을 작성했다. 늦게 거제현령 안위, 발포만호 소계남이 와서 이순신의 명령을 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에게서 배설이 겁을 먹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8월 13일에 거제현령와 발포만호가 돌아갔다.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왔는데 여수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싣고 오지 않았다. 곤장 80대를 때려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진주의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에 있던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저절로 무너졌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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