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8회]-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8회]-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하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1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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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2월에 원균은 부임하자마자 이순신이 쓰던 전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에게 신임을 받던 부하들을 모두 내쫓았다.

칠천량 해전 비 (경남 거제시 칠천교 앞)

특히 원균의 소행을 잘 알고 있는 이영남을 미워했다.
더구나 원균은 한산도 운주당에 들어박혀 애첩과 놀면서 부하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았다. (유성룡 지음·김민수 올김, 징비록, p 269-260)

4월에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요청했다.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만 명은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 조정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비변사는 원균의 장계에 대한 의견을 선조에게 아뢰었다. 
“우리나라가 30만의 정병(精兵)을 얻을 수 있으니 4∼5월 안에 수륙으로 대거 출동하여 한번 승부를 결단하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상량(商量)이 부족한 듯합니다. 그리고 30만의 정병은 4∼5월 내에 소집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 이 일은 도체찰사(이원익)와 도원수(권율)가 처치할 일이지, 멀리 조정에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 (선조실록 1597년 4월 22일)

하지만 원균은 6월 11일에 또다시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륙병진책을 건의했다. 이러자 비변사는 즉시 반박하였다.
"원균의 뜻은 육군이 먼저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도원수와 체찰사의 뜻은 그렇지 않아 수군을 나누어 다대포 등을 왕래시키면서 해양에서 요격하려는 계획입니다. (중략) 대저 군중(軍中)의 일을 제어하는 권한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있으니, 제장(諸將)으로서는 지휘를 받아서 진퇴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근일 남쪽의 장수들이 조정에 처치해 달라고 자청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체통을 유지시키는 뜻이 도무지 없습니다. 위의 사연을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선조는 비변사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사진 1-2 칠천량 해전 비 (경남 거제시 칠천교 앞)
칠천량 해전 비 

(선조실록 1597년 6월 11일)
6월 중순에 도체찰사 이원익은 종사관 남이공을 한산도에 파견시켜 원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마지못하여 6월 18일에 대소 군선 9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장문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9일에 조선 수군은 안골포로 진격하였다. 조선 수군은 적선에 육박하여 많은 왜적을 살상하니, 왜적은 해안 위로 도망하였고, 조선 수군은 왜선 2척을 빼앗았다.

이어서 원균은 가덕도로 향하였는데 왜군은 이미 섬으로 피신한 후였다. 조선 수군들이 추격하였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군은 별수 없이 추적을 그만두고 돌아오려 할 즈음에 안골포의 왜군들이 또 다시 배를 타고 역습해 왔다. 왜군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배의 좌우를 협공하며 비처럼 탄환을 쏘아대었다.
아군 역시 방패에 의지하여 화살을 다발로 쏘아대며 응전하였다.

이 전투로 보성군수 안홍국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평산 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탄환을 맞았다. 결국 원균은 부산까지 진출하지도 못한 채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후 원균은 다시 출전하기 싫은 듯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6월 29일에 안골포 전투를 조정에 장계하면서 조선 수군이 해로를 계속 왕래하면서 왜군을 교란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다. 조정에서도 원균에게 계속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지만, 원균은 조정의 지시를 묵살한 채 출전을 기피하였다.

7월 초에 새로 건조한 일본전선 6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이 전선 가운데 일부가 웅천으로 들어가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왜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7월 4일에 조선 수군은 다시 출전을 단행하였다. 이 때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 머무르면서 직접 출전하지 않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주축이 되어 휘하 수사들이 연합하여 출전하였다. 이 출전엔 전체 수군의 절반 정도인 100여 척이 전투에 나선 듯하다.

조선 수군은 7월 4일 한산도에서 출발하여 5일에 칠천도에 정박하고 6일에 옥포에 들어갔다가 7일 밤에 다대포에 도착하였다. 8일에 조선 수군은 왜선 8척을 부수고 군량미 2백여 섬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매우 고무되어 이런 전과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조선 수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7월 14일의 '난중일기'에는 왜군에게 달라붙은 김해사람 김억의 보고서가 소개되어 있다.

“초 7일에 왜선 5백여 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9일에는 왜선 1천 척이 합세하여 절영도 앞바다에서 우리 수군과 싸웠는데, 우리 전선 5척이 표류하다가 동래 땅 두모포에 도착하였고 또 7척은 간 곳이 없다.”

한편 일본 수군은 7월 9일의 절영도 바깥 바다에서의 전투에서 짐짓 싸우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조선 수군은 지쳤고 먼바다에서 풍랑마저 세차서 배가 표류하고 만 것이다.

이러자 선조는 원균이 직접 나가서 싸우지 않은 것을 크게 질책했다.

선조는 원균에게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유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7월 10일)

선조는 원균에게 전에 없이 강경한 어조이었다. 그의 질책에는 ‘원균의 실패는 이순신을 끌어내린 선조 자신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속내도 작용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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