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의 길
개미의 길
  • 문틈 시인
  • 승인 2023.07.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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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개이고 해가 난 틈을 타서 며칠 만에 바깥나들이를 했다. 비가 와도 너무 와서 어쩔 수 없이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가니 살 것 같았다. 대지는 비를 잔뜩 머금은 나무와 풀들이 초록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분이 들떠 있었다.

오는 길에는 쌈지공원을 가로질러 야자나무 껍질로 만든 베트남산 바닥 깔개를 덮어놓은 길로 왔다. 오랜만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자 개미들도 기분이 좋은지 길바닥에 나와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미를 밟을까봐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겨 딛는 중에 어떤 한 마리 개미가 자기 몸보다 서너 배는 될성 부른 초록 풀벌레를 문 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순간 나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바닥에 저러고 있다가 사람 발에라도 밟히면 어쩌나 싶어 쭈그리고 앉아 개미를 보호할 겸 벌레를 물고 가는 개미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필시 위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양을 내가 개미를 보듯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에 여러 사람이 내 곁을 비켜 지나갔다. 개미는 보풀이 심하게 난 깔개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열심히 움직였다. 개미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깔개를 벗어나 풀숲 있는 데로 이동해야 안전할 터인데 개미는 깔개 위에서만 움직였다.

나는 개미를 도와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 갈등하다가 마침내 개미의 행동에 개입하기로 했다. 개미가 물고 움직이는 풀벌레를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들어 깔개 바깥 땅으로 옮겨 놓았다. 개미는 풀벌레를 문 채로 안전지대에 안착했다.

개미는 풀들이 드문드문 난 땅에서 계속 움직였다.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개미는 한참 저쪽으로 가다가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 왔다. 개미는 먹이를 물고 그 자리를 빙빙 돈 셈이다. 혹시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먹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쭈그리고 앉아 계속 지켜보았다. 개미는 평탄한 지형에선 무척 빠르게 달리다시피 하며 움직였다. 그러다가 풀숲을 만나면 개미는 지나갔던 길로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방황했다. 풀들이 많이 돋아난 지역을 통과할 때는 풀벌레 덩치가 풀줄기에 걸려 개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개미는 잠시 풀벌레를 놓아두고 동서남북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은지 나갈 길을 탐색했다. 그리고는 다시 먹이를 물고 움직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풀숲이 많이 우거진 곳에 당도했는데 여기서 개미는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애가 타고 초조해졌다. 

내가 손가락을 내밀어 움직이기 좋을 만한 지역으로 다시 옮겨 줄까 어쩔까 생각을 하는 참에 주변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다른 개미와 서로 마주쳤다. 나는 개미끼리 먹이를 두고 싸우려는가 하고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새로 온 개미가 뒤에서 풀벌레 덩치를 밀어주었다. 마치 무거운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노파를 다른 사람이 밀어주듯이.

개미는 덕분에 곤경을 벗어났고 밀어준 개미는 제 볼일을 보러 떠나갔다. 나는 손뼉을 쳤다. 개미가 먹이를 두고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잘 가져가게끔 힘을 보태 주었던 것이다. 개미는 풀숲을 벗어나 먹이를 물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다 또 풀숲을 만났다.

이번에는 풀숲이 밀림처럼 우거져 있는 곳이라서 개미는 주변을 살피고 뚫고 나갈 길을 찾느라 한참 동안 이리저리 탐색했다. 이번엔 더 어려운 곤경에 빠진 것이다. 개미가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해 답답했다. 안다면 내가 개미의 최종 목적지 근방에 개미와 먹이를 같이 옮겨 줄 수도 있겠는데 이 장면에서 문득 나는 힘들게 살아온 내 삶이 뇌리에 떠올랐다. 

나도 개미처럼 이리저리 헤매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서 방황하던 때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 길을 찾아야 했던 날들이 개미로 비유되었던 것이다. 대체 개미는 어디까지 죽은 풀벌레를 물고 가려는 것일까. 나는 이번에는 아까처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개미가 가려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해서다. 개미는 스스로 자기 갈 길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벌치기를 나갔다가 어느 해 여름 홍수가 나 실개천에까지 물이 불어나자 개미 떼가 좁은 개울을 못 건너가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이쪽 둑에서 저쪽 둑으로 다리를 만들어 주어 개미 떼들이 건너가도록 해주었다.

나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어떻게든 이 개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 돌아다니는 또다른 개미와 마주치자 이번에도 다른 개미의 도움을 받아 운 좋게 풀벌레를 물고 풀숲을 넘어갔다. 나는 한참 개미가 가는 길을 생각해보고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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