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요일
비요일
  • 문틈 시인
  • 승인 2023.07.1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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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비가 온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비가 올 것이라 한다. 나는 잠시 비가 그친 틈에 얼른 개천가로 간다. 재작년에는 개천에 물이 불어 둑을 넘을 듯이 거대한 물더미가 넘실거렸다. 개천 안에 조성해 놓은 산책길이며, 징검다리를 삼키고 분노에 날뛰는 짐승 모양으로 큰물이 난리를 피웠다.

나는 그 무서운 물을 보려고 길을 나선다. 간밤에도 줄기차게 비가 왔으므로 개천은 대난리가 났을 것이다. 여러 해 전에는 둑이 무너져 물이 마을까지 들이닥쳤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개천은 엄청나게 물이 불어나 개천 안의 산책로는 물이 덮쳐 보이지 않는다. 산책로로 접근하는 길 초입에 출입금지 푯말이 막아서고 있다. 나는 둑에 서서 무서운 속도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개천을 흘러가는 물이 내지르는 굉음이 무섭게 들린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포효하며 거칠게 흘러간다. 불어난 물의 흐름은 재난의 현장 같다. 물이 불보다 무섭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저 멀리 산맥에 큰비가 내려 골짜기 물들이 내려와 개천을 미친 듯 휩쓸고 가는 것이다.

물이 더 불어나면 개천 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나는 겁도 나고 무섭기도 해서 더 이상 개천둑에 서 있지 못하고 돌아서 집으로 간다. 옛말에 ‘치산치수(治山治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허사가 아니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지역 곳곳에 물난리가 나 사람들이 파묻히고 물에 잠겨 익사하고, 초토화된 상황을 전한다. 지난 봄에는 가물이 들어 물, 물, 하고 지냈더랬는데 이번에는 물이 넘쳐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다. 자연의 횡포에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다.

내가 시골에 살던 어린 시절 어른들은 “이번 큰물에 논이 떠내려가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고 한숨을 쉬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논이 어떻게 떠내려갈 수 있지” 하고 의아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해 벼농사를 망치고 말았으니 논이 떠내려갔다는 말이 절실한 표현임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 어릴 적 서예를 하는 어느 분의 방에 쓰인 글이 기억난다. ‘물은 때로 개울이 되고, 폭포가 되고, 호수가 되고, 여울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물이 바다로 내닫는 여정은 이처럼 간단치가 않다. 흡사 파란만장한 인생살이의 긴 행로와도 같다.

어느 대목에서 물의 흐름이 고르지 않으면 물은 금방 성질을 부린다. 나는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외출을 삼가라는 당국이 보내온 스마트폰 문자를 보고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곳곳에서 둑이 무너지고, 물이 마을을 덮치고,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농사는 말할 것도 없다. 자연이 되게 성질을 부리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는 것만 같다.

어제도 오늘도 비가 오다 보니 태양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이대로 한정없이 비가 올 것만 같다. 여러 날 비가 올 적에는 태양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 먹구름 너머에는 눈부신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재난에 정신을 빼앗겨서다.

태양이 구름 너머에 있으니 장마통에 일어난 재난들을 잘 수습하고 앞으로도 여러 날 비가 계속 올 것이라 하니 대비를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파트로 돌아와 소파에 편히 앉아서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에 무력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저 나는 비극을 당한 사람들의 경우보다 운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내가 물에 떠내려간 버스에 탄 승객일 수도 있고, 흙에 파묻힌 주택에 살고 있었을 수도 있고, 소에게 먹이를 가져다 주는 농부일 수도 있었다.

'비가 온다/오누나/오는 비는/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여드레 스무날엔/온다고 하고/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왕십리」의 일부)

시인 김소월은 이 시의 끝 대목에서 비가 그치고 ‘구름도 산(山)마루에 걸려서 운다’고 썼다. 지금 여기는 월요일도, 화요일도, 일요일도 아니다. 날마다 비가 오는 비요일이다. 어서 비가 그치고 구름이 산마루에 걸린 모습을 보고 싶다. 비요일 뒤의 태양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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