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4회]-명나라와 일본 강화협상 '파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4회]-명나라와 일본 강화협상 '파탄'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10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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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9월에 명나라와 일본 간에 4년간의 강화교섭이 완전히 깨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가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국서를 보고 분노했다. 

교토 후시미성
교토 후시미성

1593년 3월부터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강화 협상을 하였다. 명나라는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일본에게 알렸다.
명나라는 일본이 중화 질서 속에 들어오면 감격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1593년 5월에 나고야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 국왕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명나라와 일본사이의 감합무역을 재개한다. (3) 명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 (4) 조선 팔도 중 4개도를 일본에게 항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다. (6) 일본은 포로가 된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 보낸다. (7) 조선은 일본에 항복을 서약한다

이런 히데요시의 요구는 명나라나 조선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함에도 일본의 고니시와 명나라의 심유경은 명나라와 일본 양측에 서로 숨기고 강화협상을 진행하였다.

한편 고니시는 심유경과 짜고 그의 가신인 나이토 죠안을 가짜 항복 사절로 내세워 명나라 황제에게 보냈다. 1594년 12월 7일에 나이토 일행은 북경에 도착하여 14일에 황제를 알현하였다.

명나라 병부는 나이토에게 세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1)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봉하는 것 외에 별도의 요구는 하지 말 것 (3) 일본은 조선과 우호 조약을 맺고 침범을 하지 말 것

이러자 나이토는 이를 준수하겠다고 서약했다. 1594년 12월 30일에 명 황제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하는 책봉사로 정사에 이종성, 부사에 양방형을 임명했다.

1595년 1월 30일에 책봉사 일행은 북경을 출발하여 4월 27일에 서울에 도착했고, 11월 말에 부산포 일본군 진영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1596년 3월부터 “히데요시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으려는 의지가 없고, 책봉사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붙잡아 가두어 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부산포 일대에 나돈 것이다. 이에 놀란 명나라 정사 이종성은 4월 3일 한밤중에 인장·관복·수행인 등을 버리고 변장하여 일본군 진영에서 도망쳤다.

이러자 명나라는 5월에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6월 27일에 명나라 부사 심유경은 후시미성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하였다. 정사 양방형은 6월 중순에 일본에 들어갔고, 8월 18일에 명나라 사신 수행원 자격으로 정사 황신, 부사 박홍장도 일본에 도착했다. 조선은 강화협상에서 완전 배제되었다.

9월 1일에 명나라 사절단과 황신 일행이 오사카성에 도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서 자신이 요구한 강화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명나라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9월 2일에 사건이 터졌다. 고니시와 심유경은 서로 짜고 조약담당관인 승려 세이쇼 쇼타이에게 국서를 조작하여 적당히 읽도록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자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심유경으로부터 국서를 전달받은 히데요시는 승려 쇼타이에게 국서를 읽어보라고 하자, 쇼타이는 진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히데요시가 이를 추궁하자 쇼타이는 사실 그대로 국서를 읽고 말았다. 일본이 제시한 강화 7개 요구 조건이 모조리 무시되었음을 안 히데요시는 격분하였다.
그는 책봉문을 빼앗아 내팽개치며 외쳤다.

“아니 일본 왕이야 이미 내가 하고 있는 데, 무슨 명나라 오랑캐의 책봉이냐? 게다가 나의 요구는 하나도 안 들어주고.”

히데요시는 먼저 명나라 사신을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
이러자 세 명의 원로들이 “예로부터 사신을 죽이는 나라는 없었다.”고 극력 말려서 명나라 사신들은 죽음을 면했다.

이어서 히데요시의 분노는 자기를 속인 고니시에게 날아갔다. 그는 고니시를 당장 죽이라고 소리쳤다. 다시 원로와 왜장들이 간청하였다. 고니시 만큼 조선 사정에 밝은 장수가 없으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라고 빌었다. 히데요시는 고니시의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은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일본을 빠져나왔다.

통역관 요시라는 황신에게 이번에 왜군이 조선을 쳐들어가면 전라도 쪽으로 진격할 것이 틀림없다고 일러주었다. 11월 23일에 부산에 도착한 황신은 곧장 그간의 사정을 아는 대로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심유경 사이에 벌인 4년간의 국제 사기극은 막을 내렸다. 심유경은 또 명나라에 거짓 보고하였으나 명나라는 이번에는 속지 않았다. 명나라 황제는 지금까지 강화를 추진해온 관계자들을 모두 처벌했다.
병부상서 석성이 실각되었고 심유경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1597년 7월에 부총병 양원이 경상도 의령에서 심유경을 잡았다. 그는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짐승 가죽을 말에 싣는 중이었다. 그는 명나라로 끌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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