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피우기
나팔꽃 피우기
  • 문틈 시인
  • 승인 2023.06.2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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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베란다에는 화분이 몇 개 놓여 있다. 삭막한 아파트 생활을 달래주는 유일한 손바닥 정원이다. 아내는 화분들 중 하나에 나팔꽃씨를 따로 심어 두었는데 얼마 전 네 줄기가 싹을 틔웠다. 각각의 줄기 옆에 막대를 세우고 막대 끝에 줄을 이어서 천정으로 올렸다.

그러고는 날마다 나팔꽃 줄기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루가 다르게 쑥, 쑥, 자란다. 실같이 가느다란 나팔꽃 줄기는 며칠 후 막대를 타고 올라 줄에 이르렀다. 가만히 보니 나팔꽃 줄기는 모두 다 줄을 타고 왼쪽으로 감아 돌아 올라간다.

어떤가 보려고 줄기끝을 반대로 즉,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도록 돌려놓았더니 억지로 감겨 놓은 상태를 풀고는 처음 그대로 왼쪽으로 감고 벋어간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절대로 안된다는 어떤 진리에 순종하는 법칙이라도 있나 보다. 그런 모양이 볼수록 신기하다.

나팔꽃 네 줄기 가운데 두 줄기는 서로 경쟁을 하듯 매우 빠른 속도로 줄을 친친 감고 오르더니 며칠 안 가 천정에 당도했다. 줄을 다시 옆으로 길게 이어 놓았더니 줄기는 옆으로 난 줄을 타고 계속 달리듯 벋어간다.

그런데 아내는 두 줄기 나팔꽃의 행로가 못마땅한 모양이다. 다른 두 줄기는 벌써 보랏빛 꽃들을 피우고 있는데 천정까지 줄달음친 두 줄기는 꽃을 피울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저 푸른 잎들만을 내밀고 줄을 더듬거리며 벋어가기만 한다. 아내는 대놓고 두 줄기는 꽃을 안 피워서 밉다고 했다.

꽃을 피운 다른 두 줄기는 아직도 줄기 끝이 막대 끝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 대신 열심히 꽃들을 피운다. 아마도 꽃을 피우는 데 정신이 팔려있다 보니 벋어나갈 기운이 없나보다. 꽃을 피우는 데 온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그대로 눈에 보인다.

아내는 매일 아침 꽃을 피우는 이 두 줄기 나팔꽃에만 찬사를 보낼 뿐 꽃을 피우지 않고 벋어만 가는 다른 줄기들에는 여전히 심술을 낸다. 저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느니. 심지어는 사랑해 줘 봤자 소용없다느니.

나는 아내한테 저것들이 먼저 목적지에 이르고 나서 꽃을 피우게 될지도 모르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보자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아침 아내가 소리쳤다.

“여보! 나팔꽃이 피었어요. 이거 봐요.” 하며 나를 깨운다. 이미 피어난 다른 나팔꽃보다 훨씬 더 크고 색깔도 더 진한 보라색 꽃을 피웠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팔꽃이 이름 그대로 나팔 소리를 불어대는 것만 같다.

“당신이 미워하니까 저것들이 날 좀 보라며 꽃을 피운 게 아닐까.” 그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로 나팔꽃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꽃을 피웠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식물 앞에서도 좋은 말을 골라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렇게 되는 셈이다. 나팔꽃이 싹을 틔운 후 일찍 꽃을 피우는 것도 좋지만 마치 꽃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줄의 끝을 향하여 벋어나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꽃을 피우는 것이 더 아름답다라고. 실제로 더 크고 더 아름다운 색깔의 꽃을 피우지 않았는가.

무슨 일이 잘 되려면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빨리 안 이루어진다고 발을 구를 일이 아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이 나팔꽃들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인간들의 세상일도 다 그러하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남는다. 일찍 꽃을 피운 나팔꽃 두 줄기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두 줄기 나팔꽃은 줄기를 벋어나가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가보다. 새벽마다 꽃을 피우고, 피우고, 그러더니 지금은 잠잠하다.

줄의 끝까지 당도한 다른 두 줄기 나팔꽃은 지금이 한창이다. 꽃이 피어날 도톰한 자리들을 잎 겨드랑이에 마련하고 요술을 부리듯 가녀린 줄기에서 큰 나팔꽃을 피운다.

나팔꽃은 새벽에 피었다가 아침에 진다. 바람난 남편 같다고 해서 옛 여인네들은 나팔꽃을 안 좋아했다던가. 그보다 더 옛날에는 나팔꽃을 견우꽃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나팔꽃씨를 주고 소 한 마리를 데려왔다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나팔꽃씨는 약용으로 쓰였다. 고작 화분의 나팔꽃 네 줄기를 기르는 데도 아내는 노심초사하는데 여름을 푸르게 덮은 저 온갖 식물들을 길러내는 하늘과 땅의 대공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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