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 8일에 한산 해전에서 대승한 이순신은 7월 9일에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탐망군이 안골포(安骨浦)에 왜선 40여척이 머무르고 있다고 는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즉시 즉시 전라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멸할 계책을 상의하였다.
그런데 날이 이미 저물고 역풍이 크게 일어 거제 땅 온천도(거제시 장목면 칠천도)에서 밤을 지샜다.
10일 새벽에 배를 띄워 전라우수사는 안골포 바깥 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진치고 있다가 만약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라고 약속하고,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학익진을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모두 42척이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陸)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었다.
그런데 3층으로 방이 마련된 대선 1척과 2층으로 된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있었다. 즉 어린진(魚鱗陳)을 쳤다.
포구는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날 것이므로 판옥선과 같은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어서 이순신은 여러 번 일본 전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일본 수군은 형세가 궁해지면 육지에 오르려는 계획으로 험한 곳에 의거하여 배를 매어 둔채 겁내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지자·현자 총통을 마구 쏘고 장편전(長片箭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아기살인 편전(片箭)을 말함. 편전은 주로 총통에 넣어서 쏘았다.) 등을 빗발치듯 퍼부었다.
이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복병을 둔 뒤 급히 달려와서 협공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서 방이 있는 왜군 대선과 2층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다.
그런데 왜군들은 사상자를 소선으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왜군들을 층각대선으로 모아들이며 총력전을 펼쳤으나, 조선 연합함대가 종일토록 왜선들을 거의 다 깨뜨리자, 일부 살아남은 왜군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도망쳤다.
이순신은 도망치는 적들을 끝까지 몰아치지 않고 안골포 포구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막다른 골목에 있는 왜군을 궁지로 몬다면 왜군들이 산골에 피난 중인 백성들을 살육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튿날인 11일 새벽에 이순신은 전날 싸운 곳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왜군들은 밤새 남은 배를 이끌고 도망하였다.
이순신은 어제 싸운 곳을 돌아보았다. 왜군은 전사한 왜군의 시체를 12군데에 모아 쌓고 불태웠는데 아직도 타다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었고 피가 안골포 성 안팎에 흘린 피가 곳곳에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왜적들의 사상자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7월 11일 오전 10시쯤 연합함대는 양산강과 김해포구 및 감동포구등 주변해역을 수색하였으나 왜군의 그림자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이러자 이순신은 가덕도 바깥으로부터 동래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려 세워 진을 치게 하고 주변 해역에 왜선의 존재 유무를 정밀하게 탐망하도록 탐망군을 보냈다.
이날 밤 8시쯤에 금단곶 연대로 갔던 탐망군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이 보고했다.
“금단곶 연대에서 탐망할 예정으로 올라갔을 때, 산봉우리 아래 작은 암자에 늙은 스님이 홀로 있어서 함께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김해와 양산 방향을 바라보니 적선이 늘어서 있는 수는 두 곳을 합하여 100척쯤 되었습니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요사이 날마다 왜선이 떼지어 드나들었는데, 50여 척씩 드나들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제 안골포 접전때 포 쏘는 소리를 듣고서는 지난밤에 거의 다 도망치고 지금은 100여척만 남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왜적이 두려워서 도망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였다.
11일 저물녘에 이순신은 가덕도 옆의 천성보에 잠깐 머물면서 조선함대가 오래 머물 것처럼 속인 뒤에, 야간 항해를 통해 12일 오전 10시쯤 한산도에 도착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