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35) - 무소불위의 무위소(武衛所)
조선, 부패로 망하다 (35) - 무소불위의 무위소(武衛所)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7.19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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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고종은 변방 수비에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그 대신 친위대 무위소(武衛所)는 엄청 키웠다.

지석영 집터 표시석 (서울 종로 운현궁 근처)
지석영 집터 표시석 (서울 종로 운현궁 근처)

1876년 5월 18일에 고종은 무위소에게 포도대장 후보자 추천권을 주었고, 1877년 4월 9일에는 전군(全軍)을 통솔하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무위소를 설치한 것은 사실 5위(五衛)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니, 숙위(宿衛)를 전담할 뿐만 아니라 제반 군사 사무를 총괄하여 맡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 세 개의 영(營)을 더 설치하고 총사령관(提調)은 도통사(都統使)가 겸하되 임명은 구두로 한다. 기존 중앙부대인 용호영(龍虎營), 총융청(總戎廳)도 일체 겸하여 관할하도록 분부하라.”

(고종실록 1877년 4월 9일)

1879년 10월 27일에 무위소는 경리청(經理廳)과 북한산성 방위대 병력도 지휘했다. 그리하여 1874년에 500명 정도로 출발한 궁궐 수비대 무위소는 1880년에는 전군을 통솔하는 4,400명에 이르는 막강 군단이 되었다.

1881년 11월 13일에 강화유수 이재원이 보고했다.

“진무영 지출 명목의 세입 중 인삼세(人蔘稅)가 모두 무위소에 이관되어 진무영 비용을 마련할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삼남(三南) 각 고을에서 비용을 거두어야 합니다.”(고종실록 1881년 11월 13일)

당시에 진무영 병사들 봉급은 10개월 넘게 체불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1882년 6월의 임오군란 조짐이 보였다. 결국 진무영 병력은 1882년에 군량미 부족으로 절반으로 감축되고 말았다.

심지어 국왕 호위부대인 어영청도 쪼그라들었다. 대원군 시절인 1872년에 어영청이 보유한 조총은 3,868자루였는데 1875년에는 3,750자루로 감소했고, 탄환은 116만 개에서 25만 개로 급감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1881년 11월에는 무위소가 돈을 주조하는 일까지 맡은 것이다. 이미 무위소는 한성에 흐르는 각 개천의 준설공사를 주관하고, 군수품 제작에도 관여하였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 95-96)

이로부터 6년이 지난 1887년 3월 29일에 장령 지석영(1855~1935)이 현안문제 10가지에 관하여 상소를 올렸다. 1883년에 문과 급제한 지석영은 조선에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법)을 처음 보급한 사람이다.

상소에서 지석영은 무위소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병정(兵丁)의 문제

오영(五營)을 합하여 친위군 무위소를 만드니 무기는 날카롭고 기예는 뛰어납니다. 이것은 참으로 태평한 몇백 년 동안에 있는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옛날의 군사는 공적인 싸움에 용맹했는데 오늘의 군사는 사적(私的)인 싸움에 능수입니다. 법사(法司)나 마을을 마치 평지를 밟듯이 쉽게 드나들고, 창가(娼家)나 술집을 군영(軍營)의 방처럼 여기며, 심지어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살상(殺傷)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아! 착한 장수치고 오늘날과 같은 그러한 장수가 없는데 장수가 군사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군사가 정말로 통제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착한 군사치고 오늘날과 같은 그러한 군사가 없는데 군사가 장수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으니 장수가 과연 복종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울러 지석영은 전폐, 정령, 수령문제에 대하여도 상소했다.

"전폐(錢幣) 문제

간사한 아전이 백성에게 세금을 받을 때는 어째서 전부 엽전을 쓰며, 청렴하지 못한 아전이 경사(京司)에 바칠 때는 어째서 전부 당오전을 쓰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령(政令)에 관한 문제

요즘 수령들이 교체되면 그 즉시 서로 바꾸어 놓으며, 별단(別單)에서 표창을 아뢴 것이 해를 넘겨 내려오고, 하나의 도정(都正)을 임명할 때 삼망(三望)에 모두 낙점(落點)하며, 이미 감역(監役)에 차임되었는데 계속 그치지 않고 나옵니다.

심지어 서명이 되어 있지 않은 문서를 위조하고 거짓 도장을 찍어 협잡한 흔적이 있는데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가산을 탕진하도록 하고 전형(銓衡)을 맡은 정리(政吏)가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되겠습니까?

수령(守令)에 대한 문제

대체로 수령은 조정에서 반드시 먼저 적임자를 얻어 관리로 임명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전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령이 1년마다 이동하다 보니 백성들은 관리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관리는 백성들의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나그네처럼 와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니 하리(下吏)들이 농간을 부려 공납(公納)이 지체됩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곤궁한데 수령을 영송(迎送)하는 비용이 많아지니 그 원망이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고종실록 1887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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