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34) -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34) -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7.1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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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1월 25일에 의정부에서 접견 대관에게 수호 통상 문제 처리에 전결권을 주자고 아뢰자, 고종은 윤허하였다.

경복궁 사정전
경복궁 사정전

조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헌에게 전결권을 주다니. 하기야 의정부의 대신들도 만국공법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으니 ‘도찐개찐’이었다.

1월 29일에 대관 신헌이 상소를 올려 전결권을 사양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경은 문무의 재주를 갖추고 일찍부터 명망이 드러났으니, 나는 경을 장성(長城)과 같이 믿는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라."고 비답했다.

2월 3일에 조선 대관 신헌과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는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척화비 (斥和碑)를 세운 지 5년, 대원군이 물러난 지 3년 후였다.

<조일 수호조규>는 다음과 같다.

대일본국은 대조선국과 본디 우의(友誼)를 두터이 해 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정의(情意)가 미흡한 것을 보고 다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에서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開拓長官) 구로다 기요타카와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에서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받든 유지(諭旨)에 따라 조관(條款)을 의정(議定)한 것으로서 아래에 열거한다.

사정전 일원 안내문
사정전 일원 안내문

제1관 (이하 요약함)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제2관

일본과 조선은 수시 사신을 파견한다.

제3관

양국 간의 공문은 일본은 일어로, 조선은 한문으로 쓴다.

제4관

종전의 무역 관례는 없애고 새 조약에 의해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제5관에 제시한 항구를 개항한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 항구 두 곳을 골라 개항한다.

제6관

일본국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조난 시 조선 정부는 협조한다.

제7관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제8관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국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한다.

제9관

양국 백성들은 자유롭게 거래하며, 양국 관리들은 간섭하거나 금지할 수 없다.

제10관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각기 자기 나라의 법에 근거해 처리한다.

제11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별도로 통상 장정(章程)을 제정하여 양국 상인들이 편리하게 한다.

제12관

이상 조약문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고종실록 1876년 2월 3일 1번째 기사)

강화도 조약은 한마디로 일본이 무력을 앞세운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인 1854년 2월에 흑선 8척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한 미국 페리 제독의 위협에 당하여 쇄국을 풀었다. 이로부터 12년이 지난 1876년에 일본은 미국을 답습하여 군함 3척과 수송선 2척 등 7척을 이끌고 무력 시위를 하면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 것이다.

강화도 조약에 임하는 입장은 조선과 일본이 달랐다. 조선은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는데 중점을 둔 정치적 협상이었던 것에 반하여 일본은 근대적 개항을 바탕으로 철저히 무역 확장에 입각한 경제적 협상이었다.

강화도 조약은 문제가 많았다. 제7관은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시 상륙 지점을 정탐하게 하였고, 제10관은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굴욕적인 치외법권 조항이었다

특히 제9관은 무관세 자유 무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의 자국 산업 유지와 영세상인 보호를 포기한 독소조항이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5개월 뒤인 7월 6일에 ‘조일무역규칙’이 체결되었다. 여기에는 곡물의 무제한 수출 허용과 무관세가 규정되었다. 당초 일본은 조선 측이 관세를 주장하면 5% 관세를 낼 작정이었지만, 조선 측이 관세에 대해 아무 말도 없자 무관세로 낙착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 정부의 무지하고 무능했다.

1878년에야 조선은 무관세의 심각한 피해를 깨닫고 일본과 교섭을 벌였으나 1883년 7월에야 수정·보완되었다. 결국 1876년부터 1883년까지 7년간 미곡의 무제한 수출과 무관세는 영세상인과 도시지역 하층민의 피해를 심화시켜 1882년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문호는 개방되었으나 백성들은 더욱 비참하게 살았다.

한편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주장은 과연 맞는 것인가? 다시금 논의해 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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