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의 월드컵-특별기고
우리 아이들의 월드컵-특별기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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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한국과 미국의 경기가 있는 날, 아침부터 학교가 술렁인다. 폴란드 전 첫 경기가 있던 날 오전 수업을 한 이력이 있어서 교사든 학생이든 단축수업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교실에 갔더니 "누구는 대구에 갔대요. 선생님, 대구에 직접 가서 보면 출석 인정해준 대요?"
억울한 듯 물어온다. 샘이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그 아이들에게 "그렇댄다."

대답을 하는데 약간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교실에 남아있는 아이들도 분명 가고 싶었을 텐데, 순전히 부모님의 관심과 재력 탓에 억지로 여기에 앉아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월드컵 경기장은 꿈의 장소이고, 더군다나 가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경기를 직접 표를 구해서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도 어마어마한 특권이 아닐 테니까.
평소에는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럴 때 몸으로 확인하는 가난의 설움으로 아이들은 또 한번 자신의 목표를 점검하겠지?
'돈 많이 벌어 잘 살아야지...'

신문이든 뉴스든 온통 축구 이야기로 도배가 되고, 16강 진출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듯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야단들이다. 월드컵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수업이 잘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월드컵 이야기 때문에 한 번 소란해진 분위기를 쉽게 가라앉힐 수도 없다. 이래저래 걱정을 안고 수업을 힘겹게 끌고 간다.

한국전이 있던 다음 날,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잔뜩 축구 이야기로 기대에 차 있다. 어수선한 분위기.
"너네가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무승부지. 어제 그 머리 다친 사람의 투혼도 못 봤니?"
했더니,
"에이, 선생님 황선홍 이름을 몰라서 그렇죠?"
"아냐, 알아, 황선홍."
꺄르르 웃어댄다. 한 놈이 기세를 몰아갈 심사로 계속 물어댄다.
"그럼, 어제 골 넣은 선수가 누군지 알아요?"
"안정환이잖아."
"골 넣도록 어시스트 해 준 선수는요?"
"이을용"
"와아- ?!"
"어제 차두리 잘 했지요?"
"차두리는 어제 안 나왔잖아. 너처럼 엄벙덤벙한 폼이 영 못 하잖아."
"히히.."
싱긋이 웃는 아이는 제가 놓은 속임수에 속지 않는 내가 야속하면서도 재미있나 보다.

축구의 열기를 탓할 마음은 없다. 오히려 평소엔 사회의 문제나 시사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그나마 축구라는 끈으로 국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프랑스와 세네갈의 경기를 이야기하면서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설움과 감격을 이야기 할 수도 있어서 좋다. 하지만 승리, 승리에 취한 듯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분명 문제다.

4월쯤 '말하기' 수행평가를 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 반은 관악합주를 하는 아이들로 짜여진 반인데, 그게 또 이상하게 관악부가 아닌 아이들을 몇 명 섞어 놓은 구성이어서 수업하는데 여간 골치가 아니다. 아이들간의 관심과 수준차이가 다른 반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인데, 이해가 빠르고 잘 하는 아이들이 많은가 하면, 몇 번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아이들도 여럿이다.

말하기 개인 평가를 할 때 이런 차이가 더욱 확연히 드러나, 잘하는 아이들은 또 제 잘난 맛에 못 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싶으면 관심도 갖지 않고, 야유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또 잘 못 하는 아이들은 저들 나름대로 기가 더욱 죽어서 준비한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다가 들어가곤 한다. 그래 안 되겠다싶어 방과후에 따로 그 아이들만 불러서 평가를 다시 하기로 했다.
"아무 거나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렴. 친구를 소개해도 좋고,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 네 소개를 해도 좋아."
무엇을 끄적끄적 적기는 하는데 한 삼십 분이 지나도 종이 반장을 채우지 못한다. "그래, 한 번 말해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목을 잔뜩 움츠리는 아이,
"저는 시험이 싫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항상 엄마한테 맞고, 선생님한테 혼나고 합니다. 저는 친구도 없습니다... 나 같은 게 왜 태어났나 싶습니다... 그래서 가끔 엄마한테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사랑합니다.... "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겹게 말을 해 가는 아이, 이 아이가 공부를 조금 못하는 건 사실 무슨 큰 잘못이 아니다.
못한다고 아니다고 닦달해 왔던 모습이 부끄러워 나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뛰어난 능력, 현란한 발 재간, 골 넣은 선수들과 승리에 대한 예찬만으로 우리 아이들이 축구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히려 패배와 슬픔, 능력의 부족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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