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의 반란`은 아름답다
`텃밭의 반란`은 아름답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6.1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월드컵 축구전에 투영된 `히딩크적 리더십`과 맞물려 한국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적 절망감이 배가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히딩크적 리더십`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배경에 대해 `오로지 원칙과 기량만을 중심잣대로 한 혈연과 지연, 학연이라는 모든 연고로부터의 단절과 해방`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반면 이땅의 전현직 대통령들이 대부분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배경에는 연고주의가 그 중심점에 자리잡고 있다. 연고주의라는 안경을 한시라도 벗게 되면 곧바로 쓰러질 것처럼, 이땅의 정치지도자들은 너나없이 연고주의와의 동거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을 `실패한 정치감독`으로 전락케 한 주범은 원칙과 정도의 길을 가로막은 연고주의적 정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지방선거가 `추악한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연고주의를 무너뜨리려는 `텃밭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텃밭의 반란`은 한마디로 아름다운 내전이다. 이땅의 오욕의 정치사를 원점으로 돌려 청정의 정치사를 새로이 기술하려는, 깨어난 정치게릴라들의 자기희생적 투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텃밭의 반란`에 마음으로부터의 성원을 보내는 이유는 연고주의의 정점인 반민족적 지역할거구도를 한칼에 날려버릴 수 있으리라는 야무진 기대 때문이다.

선거철만 돌아오면 필자의 고향 호남에선 어김없이 자조 섞인 한마디 말이 회자되곤 했다. `전라도 막대기`가 그것이다. 호남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뭉개버리는 자기비하적인 이 `막대기타령`을 호남인들 치고 어느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마는, 그러나 투표소의 `포장마차`에만 들어서면 최면에라도 걸린 듯 끝내 그 막대기 이름 석자에다 붓뚜겅을 꾸욱 눌러버리곤 했던 엄연한 사실까지 어찌 부정할 수 있더란 말인가.

`전라도 막대기`란 말은“선생님이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호남지역의 특수한 정치정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지엄하신 선생께서 친히 점지하신 인물이라는데 감히 어느 누가 이에 대해 토를 달 수 있더란 말인가. 그 막대기가 잘생겼건 못생겼건, 국회의원으로서 적격자건 부적격자건 언감생심 처음부터 아예 따질 일이 못되었던 것이다. 호남인들은 너나없이 선거 때만 되면“이번이 마지막이겠거니”하면서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몸에 밴 `막대기타령`과 `미워도 다시 한번`을 번갈아 가며 읊조렸다.

그러다 마침내 `적과의 동침`인가, 뭔가를 통해서 기적적으로 이뤄진 선생님의 소원. 그 숙원의 성취는 어두웠던 세월만큼이나 모조리 차압당했던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권도 하루아침에 복권(?)시켜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돼먹지 못한 경우더란 말인가. 지역민을 볼모 삼아 그토록 염원하던 호남의 한도 풀고 선생님의 마지막 소원도 다 풀었는데 `전라도 막대기들`은 여전히 척박한 황토땅에 몸을 굳게 박은 채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을 위압, 자신들의 건재를 과시하며 겹으로 으스대다니....

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선생님을 팔면서 `호가호위(弧假虎威)` 하는 볼썽사나운 현실 앞에선 순박한 호남인들도 결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소불위의 호가호위 세력에 맞서 지역민의 뜻을 좇은 `무소속연대`가 희망의 푯대로 솟아오른 배경이다.

`텃밭의 반란`은 역시 아름답다. 누군가가 한번은 도전해야 할, 그래서 지역민의 정치적 볼모 신세를 끝내 청산하지 않으면 안될, 통과의례적 결단의 의미가 `텃밭의 반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