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말의 권력남용-발전노조 파업현장에서
임기 말의 권력남용-발전노조 파업현장에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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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세상이 하도 시끄럽길래 그 실상이 어떤지 보기 위해 서울에서도 연세대, 그 유명한 노천극장엘 갔다.

지난 80년대 전국적 규모의 집회를 다 감당하였던 연세대의 노천극장을 다시 찾게된 것은 나에게는 옛 추억을 더듬는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달라진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예전엔 풀밭으로 덮여 있었던 광장, 풀만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던 산등성이가 이번에 가 보니 시멘트로 단장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노상의 광장이었다.

2002년 3월 24일 오후 7시 연세대 노천극장으로 모이라는 지령이 비밀리에 하달되었다. 발전소 노동자들의 집회가 이곳에서 열린다는 것. 발전소 노동자들은 지난 한 달 전 서울대에서 집회 투쟁을 갖고 공권력의 투입을 예상하여 자진 해산을 선포. 5000여 조합원들이 전국 각지에 산개하여 파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3월 25일까지 회사에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해고하겠다는 정부의 협박에 항의하기 위해 이 날 연세대 노천극장 집회에 동원 명령을 내린 것이다.

희한한 일이다. 일상의 파업 투쟁은 공장 점거를 위주로 이루어져 왔다. 공장을 빼앗기면 파업은 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그 동안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발전소 노동조합 지도부는 거꾸로 공장을 비우고, 파업 대오도 흩뜨려 버리는, 아직까지 전례가 없는 산개 투쟁을 명령한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5000여 조합원들이 전국 각지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유랑하면서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 무려 한 달 간 현장 복귀를 거부하면서 파업 투쟁의 대오를 유지한 것이다. 하여 이번 발전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파업 투쟁>이라고도 평가한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있기에 비록 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더라도, 일치단결의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출귀몰과 일사불란, 이것이 이번 발전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감동하는 대목이다. 이번 연세대 노천극장에서도 한바탕의 쇼가 벌어졌다. 사회자가 잘못 알고 집회 도중 산개를 명령하여 버린 것이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연세대를 둘러싼 산 위로 흩어져 나갔다. 우리도 집회가 끝난 것으로 알고, 밖으로 나가 쇠주나 한 잔 걸치려고 정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그 산개 명령이 오보였으며 다시 모이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다시 노천극장에 가 보니 3000여 대오가 그대로 재집결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하니 신출귀몰, 일사불란이라 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런 것이다. 단 한 번도 집단적 행동을 훈련받지 않은 발전소 노동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규율을 보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집회가 끝나고 정문을 나오면서 전경들에게 강제 연행되었다. 서대문 경찰서로 끌려 가, 함께 끌려 온 발전소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는데, 세상에(!), 이런 순둥이들이 또 있는가? 내가 연락한 각 방송사, 신문사 기자들이 몰려와 불법 연행에 항의하기 위한 기사를 취재하고 있는데, 순둥이 발전소 노동자들은, 모두들 얼굴을 가리고 어쩔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런 곳, 처음이예요." 당황해 하는 발전소 노동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발전소의 민영화, 발전소의 사유화, 발전소의 해외매각은 노동자의 밥줄을 끊는 일이다. 노동자에게 해고란 밥줄을 끊는 일이요, 다른 모든 억압을 다 참아도 밥줄을 끊는 조치에 대해서만큼 노동자는 반란의 대오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 5600여 조합원들 중 5000명이 파업 대오에 동참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소의 민영화와 해외매각 조치가 그만큼 비이성적인 조치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소의 사실상의 주인인 노동자들, 그들의 절대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착착 매각 수순을 밟아 나가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강압적 조치를 우리는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나는 이번 발전소 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강권적 조치를 보면서, 23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Y.H. 노동자들에게 가한 폭력 진압을 떠올렸다. 권력의 임기 말은 모두다 치매에 들어가는가. 발전소 노동자에 대한 비이성적인 강권 조치는 김대중 정부의 임기말 증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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