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우울한 날엔 싱그러움을 찾아-변산의 개암사
잿빛 우울한 날엔 싱그러움을 찾아-변산의 개암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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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낼 길을 지도를 보며 더듬어 보았습니다. 지도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사실 이런 저런 일에 매달려 쉽게 시간을 내지 못하고 허둥거릴 때 지도를 보면 지난날의 여행의 기억들이 도로를 따라 쭈욱 펼쳐지기 때문이며 앞으로 가야 할 길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잿빛으로 우울한 날들을 환기시킬 수 있는 코스를 찾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계절에는 푸르름이 그리워지는 터라 차밭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좀 더 색다른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길이 변산반도의 개암사였습니다.

눈이라도 내리면
그 푸르름이
더욱 선명한 전나무 숲길


개암사를 택한 것은 여유롭게 다가갈 수 있는 입구의 모습에 일단 걸음을 멈추고 도란거리며 걸어 들어가면 커다란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숲이 곡선을 그으며 새로운 경관에 대한 기대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암사 입구의 전나무와 소나무를 사이에 둔 길이 겨울이면 더욱 푸르게 빛나는 것도 저의 발길을 끄는 이유였습니다. 눈이라도 내리면 그 자태가 선명하게 아름다워지는 것이 전나무 숲길이기에 더욱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일요일 그 곳을 찾았을 때 그 숲길은 언제나처럼 변하지 않는 푸르름으로 길손을 반겨주고 있었습니다. 마음 한편의 여유를 가지며, 절에 들어가 보니 우뚝 선 울금산성과 대웅보전 또한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해풍 몰아치는 바닷가 한 켠에서 모진 세월을 이겨내며 자랐을 나무를 기둥으로 택해서인지 너무나 당당한 대웅보전의 모습은 언제나 우렁차 보였습니다. 하지만 좀더 멀어져서 대웅전 뒤편의 산자락과 건물을 함께 보면 병풍 같은 산세에 절이 사뿐히 앉아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그리도 위풍당당하던 것이 그렇게 또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 부처님도 우리 자연에는 그 몸과 마음까지 일체가 되는 가 싶을 정도로 얌전한 절의 모습을 만납니다.

병풍같은 산세에 사뿐히 내려앉아
백제 유민의 재건의 꿈 감싸안고
우뚝 선 울금산성과 대웅보전


요즘에 중창을 하고 새로 터를 잡는 절과는 아예 비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옛 자리에 그대로 눌러 앉은 건물들입니다. 딱히 풍수나 지리를 모르더라도 그 절의 모양새를 보며 한 세상을 일궈냈을 절의 역사를 그려봅니다. 변산 깊숙이 자리잡은 두 개의 절 중 내소사의 거대한 가람 규모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던 개암사지만 사실은 백제의 유민들이 쓰러진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그 터전을 바로 개암사의 뒤편 울금산에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산과 절의 역사는 결국 산자락에 사는 스님과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삶의 이치에 대해 조응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찰의 경내를 기웃거려 보니 대웅보전 전면에는 도깨비처럼 보이는 귀신의 얼굴이 두 개가 있습니다. 귀면이라고 하는 것이죠. 오른편의 것은 눈을 돌려서 법당안을 보고 있는 것 같고 좌측의 것은 저를 노려 보고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절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이런 귀신의 얼굴을 조각해 두었다고 하는데 찬찬히 보면 하나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정겹습니다. 제가 좀 약아졌는가 봅니다. 날아갈 듯이 올려진 처마 밑에도 조각이 있습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인데 이들은 사바세계에서 극락정토를 건너갈 때 타는 배의 머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저 무섭게 보고 말았을 그들이지만 이렇게 의미를 새겨 보면 절 안에 있는 그 무엇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습니다. 처마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풍경소리가 아름다운 것만 느끼지 왜 거기에 물고기로 하여금 종을 치게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다 어느 날 수행을 게을리 하던 스님이 그 업보로 물고기로 환생했는데 그냥 물고기가 아니라 등에 커다란 나무를 지고 있는 물고기였고 물고기가 된 스님의 스승이 그를 만났을 때 우는 목소리로 자신처럼 수행을 게을리 하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주라고 등에 있는 나무를 다듬어 그 속을 쳐서 물고기처럼 잠들지 않고 늘 정진하라는 암시를 주라는 것에서 비롯되어 목어와 목탁이 생기고 풍경소리 또한 그런 물고기가 울린다는 것을 얘기 들었을 때 절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 새삼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 느낌들을 달고 돌아서는데 스님들의 선방으로 가는 길에 기왓장과 황토 흙을 이용하여 만들어 놓은 쪽문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그 문을 들어가고 싶었지만 부처님께 삼배도 하지 않고 스님들의 길을 넘보는 제가 욕심이 과하다는 것을 느끼며 붉어진 얼굴로 그냥 바라보다 돌아왔습니다.
하늘이 잿빛이라고 모두들 잿빛으로만 두지 말고 뼈속을 파고드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고즈넉한 바다나 산사라도 다녀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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